어제 대학로 공연에서 제가 아이에게 낭독했던 편지의 내용입니다.
아이야.
양궁 알지?
엄마가 티비에서 올림픽 양궁경기를 봤는데
선수가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붙이고
천천히 팔을 뻗어서 활시위를 당겼어.
엄마는 두 손을 꼭 쥐고 발을 동동 구르며 숨죽였거든.
그 순간 신기하게도 주변 소리가 싹 사라지고,
오직 활과 선수, 그리고 호흡만 남았어.
아주 짧지만, 영원처럼 느껴졌던 그 순간
탁.
정가운데를 꿰뚫는 그 한 발에 멈췄던 세상이.... 뚫려버렸어.
그 짧고 단단한 소리에는 수만 번의 노력과 인내가 담겨있었고
관중들이 와~! 하고 소리치는 순간
엄마의 마음속에서도 뭔가 터져나왔어.
와... 진짜 탁월하다!
엄마는 그날 알았어.
주변 모든 것이 다 멈춘 것처럼 느껴지고
나와 대상이 하나가 되는 순간에
탁월함이 찾아온다는 걸 말야.
아이야, 그거 아니?
우리나라 여자 양궁은 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계속 금메달을 따왔어.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 우승 비결이 전 세계로 퍼졌는데도
금메달은 여전히 우리 몫이라는 거야.
일시적으로 반짝이는 승리가 아니라
수십 년을 이어져온 한결같은 빛으로서 말이지.
그 비결이 뭘까? 엄마가 계속 생각해봤거든?
그러다 공부를 하면서 깊은 인상을 남긴 한 분을 만났어.
엄마보다 열 살쯤 많으셨는데 열 배는 더 성실하게 공부하시는 거야.
다들 다 갈 때 혼자 한 번 더 남아 있고
다들 그냥 지나칠 때 한 번 더 확인하셨어.
그런데 그 분이 어느 날 그러시더라.
모르니깐 당연하다고.
아니 그 당연하다는 말이랑
한 번 더 남아 질문하고 배우려는 모습을 보니깐
엄마에게 무엇이 부족했는지 알겠더라.
엄마는 늘 계산하면서 배웠거든.
이 정도면 됐지. 이만하면 충분하지.
‘환경 탓’, ‘건강 탓’, ‘능력 탓’을 하며
내 한계를 미리 정해놓고 거기까지만 가자고
두 주먹을 꽉 쥐고 버티면서 배웠거든.
그런데 그분은 편안해 보이는거야. 그냥 당연한 걸 하고 계셨던 거야.
그렇게 한 번 더, 하나 더 하는 시간이 하루하루 쌓이는 걸 보니까
오래 지속될 수 있는 빛이 보이더라.
아 결국 이거구나 싶었어.
자신의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한 번 더 하는 것.
어제의 성공이나 실패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 새 하루에 내가 할 일을 그냥 당연하게 해내는 것 말야
재능보다 중요한 건
행동으로 시간을 쌓는 거라는 걸 엄마는 그분을 통해 배웠어.
엄마는 말이야.
김연아 선수도, 조성진 피아니스트도
그리고 자기가 믿는 길에서 하루 더, 한 번 더
같은 행동을 수없이 반복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반짝이는 순간에
세상이 잠깐 멈춘 것처럼 잠시 하나된 기분이 들어.
그래서인지 엄마는 하늘을 자주 봐.
고개를 들게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
닿기엔 너무 멀지만 닿고 싶은 어딘가가 있는 것 같아.
꿈이 많은 엄마였고 삶에서도 탁월한 순간을 소망했어.
틈틈이 받았던 인정은 달콤했지만,
그 인정에 익숙해지다보니 정작 내 안의 흥미는 조금씩 사라지더라.
양궁선수처럼 활시위를 팽팽히 당기기 위해
같은 자리를 수천수만번 지키는 태도도 없이
그저 우두커니 서서 빛을 바라보고 있었던 거야.
엄마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로서 산다는 게 뭔지도 모르고 살았어.
나라는 사람은 내가 가고자하는 길에서 반복되는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데 말야.
그걸 믿고 기다리지 못했지.
결국 엄마한테 필요했던 건 남들이 알아봐주는 눈부신 순간이 아니라
천천히 타오르면서도 불씨가 되어줄 하루들이었어.
어제도... 내일도... 아닌. 바로 오늘... 말야.
조용하지만 묵묵하게 내 할 일을 해나가는 그런 하루말야.
그래서 엄마는 이제
눈에 보이는 압도적인 결과보다
그 뒤를 받치고 있는 시간과 노력이 더 소중하게 느껴져.
보이지 않는 깊이를 위해
견디는 모든 것들이 정말 탁월하게 보여
히말라야 산맥 알지?
에베레스트산 꼭대기도 너무 멋지지만, 그거알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조개껍질이 발견된대.
한 때는 바닷 속이었던 땅이 하늘까지 올라온 거야. 정말 놀랍지 않니?
아이야,
사람도 하늘과 땅을 닮았어.
단번에 높아지지 않아도
인내를 쌓아가는 탁월함이
우리 안에도 잠재되어 있어.
그래서 엄마도 이제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딛고
한 걸음씩 나아가보려고 해.
이제 겨우 시작이지만
하늘만 올려다보며 멈춰 서 있기보다는 조금씩이라도 걸어보려고.
그러니 우리 함께 걸어볼래?
너무 먼 곳에 닿으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오늘 하루.
내가 당길 수 있는 화살 한 발이면 충분해.
화살이 부러져도 괜찮고 빗나가도 괜찮아.
쏘아올린다는 것 자체. 그 자체가 바로 네가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멀리 쏘는 화살보다 더 중요한 건
오늘의 한 발이
내일의 너를 맞히는 거거든.
그러니 우리
어제의 성공이나 실패에 머물러있지 말고
내일의 불안 앞에서 망설이지 말고
그냥 오늘을 살아보자.
그리고 나머지는 하늘과 땅에 맡기자.
오늘의 하루하루를 걷는 이 길에서 하늘과 땅이 너에게 건네는 선물...
그게 바로 ‘탁월함’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