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모든 관계에 공을 들였다.
관계에서 오는 기쁨이 컸고 큰 기쁨만큼 그것을 오래오래 붙들고 싶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중학교 동창들을 만나 모임을 가졌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고등학생 때 속했던 동아리 선후배들과 그렇게 연을 이어나갔다.
대학 동기들 학회 선후배들과 만남이 그렇게도 좋았다.
그 외에도 개별적으로 닿는 인연들까지 놓치고 싶지 않아 사람을 정말 많이 만났다.
나와 오래된 동네 친구들은 나의 수많은 만남의 행태를 보며 관계에 발만 담그고 다니냐고 나무랐다. 그러나 나는 모든 만남에 진심이었고 모든 관계를 사랑했다.
아주 친했던 친구가 있었다.
멀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친구였다.
고등학교 3년 간 가장 예민했을 시절 우리는 미래를 그리며 함께했다.
우리는 순수했고 즐거웠다. 그녀와 함께라면 매사가 호기심과 모험으로 가득했다.
독서실에서 나와 잠시 쉴 때 가로등 불빛 아래 한가득 떨어져 있는 노란 은행나무 잎을 보면서 찬란한 가을 부푼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들이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관계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의심은 해본 적이 없었다. 2003년에 시작된 우리의 우정은 2018년까지 변함없이 이어졌다. 아마 나만 '변함없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벌써 한 7년이나 되었구나. SNS에서 서로의 상태가 더 이상 팔로우/팔로워가 아닌 것을 보고 처음으로 충격에 빠졌었다. 각자 아이를 키우고 임신하고 미국에 있었던 터라 얼굴을 보진 못했다만 연락은 계속 주고받았었다. 갑작스러운 SNS 상태에 적잖이 당황했다. 이유가 있을 것이야. 뭔가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겠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다려보자.
나의 무언가가 불편했을까? 아니면 힘든 시기를 보내는 것일까?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캐내려고 하지 않았다. 이유를 따지거나 캐낼 만큼 우리는 가벼운 사이가 아니었고 실수는 아닐 거라 확신했다. 상대에게 공간이 필요한가 보다 싶은 마음으로 믿고 또 믿었다.
그 사이 나도 아이들을 낳고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또 살면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다 보니 먼저 다시 연락을 해봐야겠다 마음을 내지 못했던 것 같다. 기다려보면 연락이 오지 않을까 희망을 가졌던 것 같기도 하고. 어렴풋이 왜 나를 차단했을까 짐작이 가기도 한다. 나로부터 보여지는 삶이 친구를 불편하게 했나 보다 싶기도 하다.
인스타그램을 끊은 지 2년이 되어간다. 정확히 끊었다기보단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들어간다. 들어가도 2년 전에 설정해 두었던 시간 15분 알람이 뜨면 그냥 끈다. 오랜만에 볼만큼 봤다 싶다. 인스타에 들어가면 유용한 정보도 많고 사람 사는 소식도 듣는 것 같아 좋다. 그런데 나도 나만의 공간과 시간이 필요해 잠시 제동을 걸었을 뿐이다.
지난 3년간 만남을 거의 최소화하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있다. 말은 이렇게 해도 한 달에 2번 정도의 부부모임 혹은 1-2번 정도의 개인 약속이 있는 것 같다. 혼자 있는 시간이 정말로 너무 좋다. 홀로 사색하고 책 읽고 하고 싶은 공부 하면서 내가 사람들을 만나 관계를 가졌을 때만큼의 만족감과 기쁨을 얻는다. 이런 시간들은 나와 매일 만나러 가는 시간이다. 나와 마주하는 시간이 좋고 책 속의 저자들과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매일같이 기다려진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과거의 따듯함을 붙들고 싶을 때가 있다. 예전 직장모임이나 동창모임에 나가면 과거 우리의 열정과 순수함을 마주하는 기분이 든다.
허나 이제는 관계에 집착하지 않는다.
시절 인연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인연이란 다 한때다. 이어질 인연은 이어지는 것이고 떠날 인연은 떠나게 되는 게 자연의 이치 같다.
아주 소중했던 친구와의 인연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마음 깊이 믿고 있다. 우리의 마음은 진심이었고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었기에. 그렇지만 억지로 붙들려고 하지는 않을 예정이다. 분명 우리는 머지않아 언제 어디선가 마주칠 것 같고 그럼 서로를 안아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내가 분명 어리석은 말이나 행동을 했겠지 혹은 친구에게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했겠지 싶다.
요즘은 어떠한 누구를 만나도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냥 지금 이 순간 함께하는 동안 가장 최선을 다해 서로에게 집중하고 진심으로 대하고 서로에게 스며드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만남이 너무 좋아 관계를 오래오래 붙들고 싶었던 나의 과거의 모습을 바라보며 관계에 있어도 초연하되 매사에 진심이기를 희망한다.
인연은 오래 함께할 수도 시절인연으로 지날 수도 있다.
오래 한다고 좋은 것도 한때였다고 나쁜 것도 아니다.
그냥 함께하는 동안 서로에게 몰입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행복하면 그만이다.
또 함께 소중했던 시간과 추억과 사랑을 이따금씩 떠올리며 오래오래 마음에 품으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