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 발라드] 신승훈의 <끝에서, 서로에게>
나는 가을이 오는 것이 두렵다. 서늘해지는 날씨와 함께 한 해가 저무는 느낌이 들면서 묘한 상실감이 찾아 들기 때문이다. 한때 함께 했으나 지금은 곁에 없는 존재들이 자꾸만 떠오르면서 마음이 울적해지곤 한다. 무척이나 더웠던 올 여름조차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런 내게 이번 가을은 시작부터 유독 힘이 들었다. 지난 10월 초 일주일 사이에 나는 세 건의 부고를 접했다. 언제나 따뜻하고 다정했던 외숙모님을 잃었고, 상담심리사로서의 근본을 알려주신 존경하는 교수님도 세상을 떠났다. 만나 뵌 적은 없지만, 책으로 영상으로 내 삶의 모델이 되어 준 제인 구달 선생님도 이제 곁에 없다. 가을이면 떠오르는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기억과 부고 소식까지 접하면서 나는 올 가을, 짙은 우울감에 빠져 지낼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이런 나를 우울의 자리에서 건져준 노래가 있다. 바로 올해 데뷔 35주년을 맞은 가수 신승훈의 새 노래 '끝에서, 서로에게' 다. 차분한 멜로디에 얹힌 신승훈의 따뜻한 음성, 그리고 상실을 수용하며 살아가는 마음에 대한 가사까지. 이 노래 덕에 나는 이 가을을 꽤 포근히 건너고 있다.
아득한 줄 알았는데 떠오르는 기억들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득히 깊어서 보이지도 않아 내 마음 안에 널 길어 올리다 여전히 아파서 흠칫 놀라곤 해.'
아마도 상실을 겪어본 이라면 누구라도 이 첫 소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많은 이별을 겪지만, 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나 역시도 돌아보면 참 많은 것들을 떠나 보냈다. 부모님 두 분이 내 곁을 떠났고, 늘 나와 함께 하던 첫째 반려견도 2년 전에 떠나보냈다. 이들과 헤어졌을 땐, 도저히 살아질 것 같지 않았지만, 지금 나는 이렇게 아무 일 없었던 듯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아득한 일처럼 느껴지더라도 불현듯, 내 안에 이들이 살고 있음이 느껴진다. 특히, 가을이 되면 나는 더 그렇다. 부모님이 좋아하시던 음식만 봐도, 반려견과 함께 걸었던 공원만 지나가도, 이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여전히 '울컥'하는 내 모습에 놀라곤 한다.
사실, 난 지금까지 이런 기분이 들 때면 얼른 빠져나와 일상으로 돌아오려 했다. 일부러 약속을 만들기도 하고, 급하지 않은 일들을 급한 듯 해치우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다음 소절에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신승훈은 이어서 이렇게 노래한다.
'오래도록 네가 있어 내겐 다행이고 불행이야.'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오래도록 그 존재를 간직할 수 있는 건, 때로는 힘들지만 '다행'인 일이기도 하다. 심리학에서는 진짜 죽음은 그 존재가 세상에서 완전히 잊힐 때 찾아온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이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건, 여전히 내 마음 속에 이들이 살아 있다는 의미일 테다. 또한, 그만큼 깊이 사랑하고 많은 추억들을 나눴기에 마음 속에 더 오래도록 남아있는 것 아닐까. 이를 기억해내자 울컥한 감정에, 사랑하는 이들과의 기억에 조금 더 오래 머물 수 있게 됐다. 노래 가사처럼 '눈물 어린 얼굴로 웃으면서' 말이다.
영원한 것은 없지만
그러자 사랑했던 이들과의 좋았던 추억들이 더 많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헤어질 때 슬프고 힘들었던 기억들은 부모님이 내게 남겨준 따뜻한 말들이 덮어주었고, 반려견의 마지막 모습보다 함께하며 즐거웠던 순간들이 더 자주 떠올랐다. 가을이 짙어지고 있지만 마냥 우울하지는 않은 건 바로 이런 좋은 기억들이 자주 찾아오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좋은 순간'은 언제나 영원하지 않다. 부모-자녀든, 연인이든, 부부든, 친구든, 반려동물과의 관계든, 모든 관계의 끝은 언제나 '이별'이다. 연인이 부부가 되어 백년해로를 한다 해도 언젠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이치니 말이다. 관계 뿐 아니라, 시간도 우리를 떠난다. 젊음의 시간은 지나가기 마련이고, '리즈 시절'도 사라진다. 그렇게 우리는 끝을 향해 하루하루 나아간다.
신승훈 역시 이런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노래한다.
'그 오랜 시간의 마디마다 우리 둘이 새겨 놓은 건 영원히 빛나는 별 같은 건 아니었나 봐.'
'더 행복할 수 없던 순간도 벅찬 눈물 흘리던 날도 영원히 빛나는 별 같은 건 아니었나 봐.'
그렇다면, 우리가 맺는 인연들은 다 허무한 것 아닐까. 어차피 헤어질 것을 왜 우리는 그토록 만남을 갈망하고 사랑하고 애달파하며 살아가는 걸까.
이 세상 어딘가에 스며들어 있는 우리들
신승훈은 이에 대해 단호히 '아니'라며 이렇게 노래한다.
'숲을 지나오면 숲의 향기를, 바다에 안기면 바다의 그 푸름을. 사랑을 하면 어느 새 따스한 미소와 말투까지 닮아가듯~ 우리가 반짝이던 시간들은 다 이 세상 어딘가 스며들었겠지.
그래서 이젠 혼자서 걸어도 외롭지 않은 거야. 참 좋았던 기억을 간직한 두 사람이니까.'
이 소절을 듣고 나는 정신이 '멍'해왔다. 상담심리사로서 알고 있었지만, 실천하지 못했던 심리학적인 진리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관계를 통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아간다. 특히, 친밀하고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다양한 감정들을 주고 받는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알아가고 자아의 폭을 넓혀 간다.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하면서 변화하고 확장된 모습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 새겨지고 이를 통해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것이다.
나아가 변화한 각자의 모습은 우리가 만나는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세상 속 어딘가에 스며들어 간다. 때문에 우리는 그 많은 이별을 하면서도 외로움에 주눅 들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끝은 늘 이별일지라도 살아서 만나는 모든 관계들은 의미가 있다. 곡의 하이라이트기도 한 이 마지막 소절은 이런 진실을 매우 따뜻한 비유로 알려주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중요한 방법은 그들이 형성하도록 도와 준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철학자 마크 롤랜즈는 책 <철학자와 늑대>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잃을 때마다 마음에 새기는 구절이다. 어쩌면 '끝에서, 서로에게'는 롤랜즈의 이 말을 노래로 풀어 준 것이 아닐까 싶다.
이 가을 나는 '끝에서, 서로에게'를 들으면서 다짐한다. 사랑하는 이들을 떠올리면서, 그들이 변화시킨 내 모습을 더 많이 사랑하자고, 그리고 그들에게 배운 것들을 이 세상과 나누면서 살아가자고 말이다. 그럴 때 지금은 곁에 없지만, 소중했던 이들과의 시간은 물론, 앞으로 다가올 시간까지 더욱 의미있어 질 것이라 믿는다.
끝에서, 서로에게 (신승훈 작곡, 윤사라 작사)
아득히 깊어서 보이지도 않아
내 마음 안의 널 길어 올리다
여전히 아파서 흠칫 놀라곤 해
오래도록 네가 있어
내겐 다행이고 불행이야
그 오랜 시간의 마디마다
우리 둘이 새겨 놓은 건
영원히 빛나는 별 같은 건 아니었나 봐
추억이라는 건 정말 아무 힘이 없더라
같은 걸 잃어버린 사람들은 다
똑같은 슬픔을 안고 살게 될까
그래도 우리 이별의 끝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눈물 어린 눈으로도 웃는 두 사람이 되자
더 행복할 수 없던 순간도
벅찬 눈물 흘리던 날도
영원히 빛나는 별 같은 건 아니었나 봐
고장 난 가로등처럼 그저 거기 있을 뿐
같은 걸 잃어버린 사람들은 다
똑같은 슬픔을 안고 살게 될까
그래도 우리 이별의 끝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눈물 어린 눈으로도 웃는 두 사람이 되자
숲을 지나오면 숲의 향기를
바다에 안기면 바다의 그 푸름을
사랑을 하면 어느새 따스한 미소와 말투까지
닮아가듯
우리가 반짝이던 시간들은 다
이 세상 어딘가 스며들었겠지
그래서 이젠 혼자서 걸어도
외롭지 않은 거야
참 좋았던 기억을 간직한 두 사람이니까
*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나의 인생 발라드' 기획의 일환으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