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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Mar 25. 2021

부모의 경로와 아이의 경로는 다릅니다!

[TV 리뷰] JTBC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를 통해 본 부모와 아이

 새 학년이 시작되는 3월.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3월은 더욱 특별할 테다.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 서로를 알아가기에 바쁜 아이들과 더불어 부모들 역시 붕 뜬 마음으로 지내게 된다. 내게 올 3월은 더욱 그렇다.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을 했고, 거의 1년 만에 정상 등교를 하고 있다(이 곳 대구는 대부분의 학교에서 전교생 매일 등교를 실시 중이다). 오랜만의 학교 생활인 데다 초등학교와 완전히 다른 중학교 생활이라 그런지 아이는 매일 같이 학교에서의 일들을 조잘대며 전해준다. 나 역시 아이의 설렘과 긴장을 고스란히 느끼며 지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오늘은 학교에서 '나를 소개합니다'라는 걸 썼어. 내가 좋아하는 거, 싫어하는 거. 가고 싶은 고등학교 등 엄청 많이 적었어. 부모님의 좋은 점과 싫은 점도 적으라고 하던데? 근데 말이야. 나의 장래희망을 적으라면서 밑에 부모님이 원하는 장래 희망도 적으라고 되어 있더라? 부모님이 바라는 장래 희망은 왜 묻는 걸까?"


  생각해보니 그랬다. 초등학교 때 적었던 서류에도 아이의 장래 희망과 부모가 원하는 장래 희망을 같이 적으라고 돼 있었던 게 떠올랐다. 아이의 희망만 적으면 아이를 파악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걸까. 왜 우리 아이들에겐 자신들의 꿈만큼 부모가 바라는 꿈을 아는 게 중요한 걸까. 여러 가지 생각과 고민이 밀려왔다.


  그러던 중 JTBC 드라마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를 만났다. 지난 15, 16일 2부작으로 방영된 이 드라마는 나의 고민과 맞닿은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었다.


'소확행' 딸과 '노오력파' 엄마  


   

엄마와 딸이 각자의 경로를 찾아가는 여정을 다룬 JTBC 드라마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 JTBC


 '노력 없이 어떤 행운도 없다'고 믿는 비혼모 경혜(박지영)는 악착같이 일하며 돈을 모아 딸 수지(남지현)를 부족함 없이 키워낸다. 수지는 엄마의 신념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를 믿으며 세상에 나가려 하지만, 매번 좌절당하고 만다. 바늘구멍 같은 취업문은 사회구조적 문제이건만, 경혜는 '노력과 열정이 부족하다'며 수지를 다그칠 뿐이다. 이에 수지는 폭식증을 앓을 만큼 피폐해져 간다. 이런 수지에게 나타난 남자 친구 성찬(김범수)은 수지의 유일한 탈출구이다. 수지는 엄마 몰래 남자 친구와 동거를 하며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꿈꾼다.


  하지만 결국 동거 사실을 들키게 되고 경혜는 "동거하는 꼴은 볼 수 없다"며 결혼을 강요한다. 수지와 성찬은 엄마의 뜻대로 결혼을 강행하지만, 결혼식 날 성찬이 사라져 버리며 물거품이 되고 만다.


 딸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딸이 원하는 것을 물어봐주지 않는 엄마. 그리고 그런 엄마에게 저항해보지만, 결국 엄마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 딸. 이들의 모습은 '부모의 꿈'을 전제하지 않고는 '나의 꿈'을 이야기하기 힘든 요즘 아이들과 자녀에게 자신의 꿈을 투사하지 않고는 꿈꿀 수 없는 부모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했다. 나는 부모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애쓰고 있는 수많은 아이들과 그런 삶을 살다 절망에 빠진 채 상담실을 찾아왔던 여러 명의 내담자들이 떠올랐다.


싸우며 서로를 알아가는 모녀


  그렇게 엄마와 수지는 성찬을 찾아 나선다. 성찬을 찾아가는 길에서 모녀는 치열하게 다툰다. 엄마는 '죽을 뻔한' 위기를 겪으면서도 무작정 성찬을 찾겠다는 딸에게 멋진 조언들을 한다. 하지만, 엄마의 조언은 딸에게 죄책감을 유발할 뿐이다.


 "니가 맨날 말하는 소확행. 그거 다 자기기만이고 자기 합리화야. 당장 힘드니까 사탕 하나 물고 행복하다고 하는 거잖아. 뭐 하나 지 손으로 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 하찮은 행복에 정신승리하는 거라고." (엄마)


 "정신승리면 좀 어때. 나도 분해.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잖아. (...) 이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게 아니라 내가 부족해서 루저가 된 건 아닐까. 하루에도 수 천 번씩 내 탓을 했어." (수지)


  이들 모녀가 내뱉는 대사들은 현실 속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부모들이 '열심히 공부해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성공하는 삶이라 믿으며 아이들에게 이런 신념을 전파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상당수의 아이들은 부모의 믿음에 따라 살아가면서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를 하거나, 자신의 노력 부족을 탓하며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드라마 속의 모녀처럼, 부모의 신념을 자녀에게 강요하고, 이로 인해 갈등을 빚는 일은 주변에서 늘 벌어지고 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학교에서 '나의 꿈'과 '부모의 꿈'을 함께 묻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갈등의 정도가 아이의 학업과 성장에도 큰 영향을 미칠 테니 말이다.


    

수지는 엄마의 뜻에 따라 결혼식을 올리려 하지만, 예비남편 성찬은 결혼식장에서 도망치고 만다. ⓒ JTBC


지켜본다는 것의 의미
 

 하지만 여행은 이들에게 깨달음의 기회들을 제공한다. 경혜와 수지는 아들을 아주 멀리서 바라보며 지켜왔던 성찬의 어머니 숙청(서정연)을 만난다. 경혜는 자신과는 다르게 아들과 지나치게 먼 거리를 유지하며 사는 숙청을 통해 자신이 마음대로 딸의 삶을 재단해온 것은 아닌지 처음으로 성찰하기 시작한다. 한편, 수지는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정리해낸다.


 "엄마가 내 인생에 동동거리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 다 나를 지키기 위한 방법이라는 걸 알아요. 어릴 땐 그게 좋았는데 지금은 숨 막혀요. 어떨 땐 엄마가 너무 미워서 도망치고 싶다가도 그런 생각을 하는 제가 더 미워져서 그냥 주저앉아 버려요. 결국엔 엄마가 정하는 대로 내 인생이 흘러가는 것 같아요."


그리고 반문한다. 


"가끔은 엄마가 날 위한 거라는데 그게 날 위한 건지 모르겠을 때가 있어요.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아 놓고, 그게 날 진짜 위한 걸 수 있을까요?"


 수지의 이 말은 '부모가 내게 바라는 장래 희망'을 중시하는 세상에서 자녀들이 부모에게 하고 싶은 바로 그 말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내 마음을 먼저 물어봐 달라고, 부모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다를 수 있음을 알아달라고, 그리고 다를 경우 내 인생은 내가 살아가는 것임을 기억해달라는 항변같이 들려왔다.


  이후 경혜는 성찬이 머물고 있는 사찰에서 동자승으로부터 의미 있는 이야기를 듣는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할 때, 처음엔 엄마 닭이 함께 껍질을 쪼아주어야 하지만, 금이 가기 시작하면 엄마 닭은 물러서서 지켜보기만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경혜에게 큰 울림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는다. 이젠 딸에게서 한 걸음 멀리 떨어져 지켜봐야 할 때임을 말이다. 이렇게 여행을 통해 각자의 경로를 확인한 경혜와 수지는 이탈한 경로에서 돌아와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


    

때로는 같은 곳을 바라보기도 하지만, 엄마와 딸은 궁극적으로 서로 다른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독립된 사람들이다. ⓒ JTBC


 이 드라마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무척이나 안타까운 뉴스가 들려왔다. 엄마에게 의대 진학을 9년이나 강요당했던 일본의 한 여대생이, 또다시 자신에게 조산사가 되라고 강요하는 엄마를 살해했다는 뉴스였다. 충격적이면서도 어딘지 남의 일 같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왔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속 수지의 말들과, '부모가 원하는 장래희망'을 적어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자꾸만 이 뉴스와 겹쳐졌다. 


  부모가 아이의 미래에 대해 그림을 그려보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부모의 장래희망이 '바람'을 넘어 '강요'가 되는 일이 너무나 잦다. 학교에서도 이를 인식하고 있었기에 아이와 부모의 장래 희망을 함께 물었을 것이다. 조사한 자료는 아이와 부모 사이의 갈등을 파악하고 이를 돕기 위해 사용될 것이라 믿는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걱정이 된다.


  이런 것들을 적음으로 해서 아이가 '부모가 바라는 장래희망'을 자신의 경로를 설정하는 데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으로 인식하게 되지는 않을까. 그래서 혹여나 자신만의 경로를 이탈했는데도 알아채지 못하는 건 아닐까. 또한 부모들은 '아이에게 자신이 바라는 장래희망'을 요구하는 게 마땅한 거라 오해하게 되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굳어지면 결국 일본의 여대생 사건과 같은 비극이 한국에서도 벌어지게 되는 건 아닐까.


 부디 아이들이 부모가 무얼 원하는지와는 상관없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나를 비롯한 부모들은 '내가 바라는 경로'가 아니라 아이가 '자신만의 경로'를 찾아갈 수 있도록 기꺼이 응원해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드라마의 마지막 멘트처럼 우리는 스스로가 설정한 경로를 가고 있을 때 비록 길을 잃어도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또 길을 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다. 어떤 길이어도 그건 내가 가는 길이니까." (수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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