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리뷰] JTBC <해방타운>이 보여주는 중년의 해방
올해 나는 정확히 결혼 15주년을 맞았다. 지난 15년을 돌아보면 혼자가 아니었음에 무척이나 감사한다. 남편이라는 든든한 삶의 동반자가 있었기에, 그리고 아이와 강아지로 구성된 지금의 가족이 있었기에 수많은 일들을 겪어내면서도 성장하며 살아올 수 있었다. 다시금 나의 가족에게 사랑과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럼에도 요즘 내겐 새로운 취미가 하나 생겼다. 바로 인테리어 앱에서 원룸 인테리어를 찾아보며 그 공간에서 홀로 지내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완전히 홀로 살아본 적이 없는 나는 가족이 있음에 감사하면서도 홀로 살기를 꿈꾼다. 때로는 이런 마음이 일탈처럼 느껴져 살짝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던 중 JTBC의 새 예능프로그램인 <내가 나로 돌아가는 곳 - 해방타운>(아래 <해방타운>)을 만났다. 평소 예능을 즐겨보진 않지만, '내가 나로 돌아가는 곳'이라는 문구에 사로잡혀 프로그램을 정주행 했다. 가수 장윤정, 발레리나 출신의 주부 윤혜진, 배우 이종혁, 예능인이 된 허재. 중년의 기혼자들인 이들이 가족을 떠나 홀로 지내는 모습을 담은 이 프로그램은 나의 욕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나와 같은 마음인 출연진들은 모두가 가족들을 무척이나 사랑하면서도 홀로 되기를 소망했다. 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 욕망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또한, 윤혜진과 허재의 모습을 통해 중년기의 홀로 되고픈 욕구가 의미하는 바를 정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왜 혼자되기를 갈망하는 걸까? 왜 그토록 사랑하는 가족들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하는 걸까? <해방타운> 입주자인 윤혜진과 허재를 통해 홀로 되기를 꿈꾸는 중년의 심리를 탐구해본다.
'~답게' 살아간다는 것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한 켠에 한동안 걸려 있던 표어를. '어린이다운 어린이'. 당시 이 문구의 의미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어렴풋이 '~답다'는 것은 참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나는 '~답다'라는 말을 칭찬으로 알아들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학생답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졌고, 신문기자로 일할 때는 '기자답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 했다. 나는 늘 '~답기' 위해 애써왔다. 결혼을 한 후에는 '며느리답고, 아내답기 위해' 노력했고, 아이를 낳은 후엔 그 무엇보다 '엄마답기 위해' 살아왔다. 아마도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지금 40대 이상을 살고 있다면, '~답게' 살아오는 것에 무척이나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답게' 사는 것을 분석심리학에서는 '페르소나'라고 부른다. 페르소나는 칼 융이 명명한 개념으로, 사회적 규범이나 역할에 맞게 살기 위해 (그러니까 ~답기 위해) 자신의 진짜 인격을 숨기고 남들이 보기에 좋은 인격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페르소나는 개인이 집단이나 사회에 적응하고 역할에 맞는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요소이기도하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진짜 인격하고는 거리가 있다. 때문에 '페르소나'로만 사는 것은 사람들에게 진짜 나를 찾고 싶은 열망을 느끼게 한다. 융은 특히 중년이 되면 그동안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에 맞춰 살아왔던 페르소나를 벗고, 진짜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더 강하게 발동된다고 했다.
때문에 중년 이후에 사람들은 그동안 살아왔던 모습과는 반대되는 모습을 발현시키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여성이 억압해 온 남성성인 아니무스 그리고 남성이 억압해온 여성성인 아니마다. 중년 이후, 부부관계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은 페르소나를 벗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고 싶은 욕망이 표현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융은 중년에 이른 사람들은 자기 원형의 힘을 발휘하고, 이를 통해 한쪽에만 치우쳐서 살았던 가면을 벗고 스스로를 통합해간다고 했다. 융은 이렇게 자기를 실현해가는 것을 '개별화'라고 불렀다.
엄마가 아닌 나를 찾아라
<해방 타운>에서 내가 읽은 것은 페르소나를 벗고 개별화되어가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특히, 윤혜진과 허재는 가부장 문화의 이분화된 성역할에서 벗어나 온전한 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뚜렷이 보여줬다.
먼저 윤혜진은 1회 해방타운에 입소하면서 "엄마, 엄마, 엄마. 이 말을 그만 듣고 싶었다"고 말한다. 딸 지온이를 끔찍이도 사랑하지만, 엄마라는 정체감으로만 살아온 시간들이 숨 막혔다는 솔직한 고백이었다. 그래서인지 윤혜진의 해방타운 생활은 엄마가 아닌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시간들로 채워졌다.
해방타운 첫날 윤혜진은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나 추억들을 나눈다. 삶의 많은 부분을 공유해온 친구들과의 만남은 그녀가 쓰고 있는 가면을 벗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냥 윤혜진이 내 친구들을 만난 거지"라고 말하며 살짝 눈물을 비치는데 이는 진짜 나를 만난 순간의 감동을 잘 보여주었다.
둘째 날에는 해방타운까지 발레 바를 가져가 연습을 하는 모습이 방송된다(3회분). 신음소리를 내면서도 운동을 쉬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자유롭기보다는 힘겨워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운동할 이유는 없지만, 그냥 내 마음 한 구석에 내 컨디션과 내 몸 상태가 무용수로서 갖춰져 있다면 콜이 왔을 때 바로 무대로 갈 수 있는 확률이 크잖아요"라고.
이런 마음은 발레리나 시절 동료들을 찾아가 함께 공연하는 모습에서 더욱 잘 드러났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몸이 기억하는 발레 동작들은 엄마 윤혜진과 발레리나 윤혜진이 통합된 듯한 감동을 선사했다. 윤혜진에게 해방은 단지 쉬고 즐기는 것보다는 엄마라는 가면 뒤 숨겨두었던 자신의 모습을 꺼내어 보다 온전한 나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반쪽짜리 삶에서 벗어나라
윤혜진이 해방되어 자신의 사회적 자아를 찾아갔다면, 허재는 해방타운에서 처음으로 홀로 자신을 돌보는 일들을 한다. 1~2회 방송분에서 허재는 난생 처음으로 쌀을 씻고 밥을 지어보고, 드럼 세탁기를 돌려본다. 된장찌개를 끓이겠다고 레시피를 적어 힘겹게 장을 보고, 집에 와서 '아이구'를 연발하는 그의 모습은 해방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러나 허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일상에서 한 부분은 하나도 없었던 것 같아요. 어릴 땐 부모님, 성인이 되면서 주위에서. 성인이 되고 감독 생활을 하면서 남들에게 도움을 받았던 부분은 제가 한 번 혼자 헤쳐나가야 할 거 같아요."
이는 그동안 사회적 자아 즉, 농구선수, 감독 그리고 현재의 예능인으로서만 살아왔던 그가 억눌러왔던 다른 자아를 만나고 싶은 욕구를 드러낸 부분이었다. 즉, 그동안 가부장 문화에서 남성의 것으로 알려진 부분들만 하고 살아왔다면, 이제는 반대 측에 있는 돌봄도 실천해내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이는 아니마(남성이 억압해온 여성적 자아)를 끌어올려 보다 온전한 한 사람으로 통합되고자 하는 욕구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그는 혼자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집을 치우며 기쁨을 느낀다. 시청자들이 보기엔 고생인 것처럼 보이는 그의 해방 타운 생활은 그에게는 전통적인 남성성에서 벗어나 온전한 나를 찾아가는 진정한 해방의 여정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온전한 나의 모습을 찾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참으로 생기있어 보였다. 스튜디오의 패널들은 이들의 모습을 보고 "표정이 달라"라고 연발하는데 아마도 이는 통합된 내가 발산하는 생기가 전달됐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들의 생기 넘치는 표정을 보고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홀로됨을 꿈꾸는 나의 마음은 일탈이 아닌 온전한 내가 되고 싶다는 신호임을 말이다.
어릴 적 칭찬으로 알아들었던 '~답다'라는 말이 이젠 마냥 좋은 말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중년에 이른 우리들은 그동안 많은 역할들을 수행하며 살아왔다. 가정에서는 딸, 아들, 형제자매로서 역할을 잘 해내기 위해 애써왔을 것이고, 학교에서는 학생답기 위해 노력하며 성장했을 것이다. 성인이 된 뒤에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각종 가면을 쓴 채 살아왔을 것이다. 결국 주어진 환경이 요구하는 것 외의 다른 나의 모습들은 억압하거나 외면한 채 중년에 이르렀을 것이다.
중년기 해방은 이렇게 억압해 온 나의 또 다른 모습을 찾아가는 것 아닐까. 이런 진짜 나를 마주하는 가장 좋은 환경은 모든 역할에서 자유로운 때, 그러니까 혼자 있을 때일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토록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마음 한 켠에 홀로 되고픈 욕구를 품고 있는 것은 있는 것일 테다.
현실의 우리들이 <해방타운>의 출연진처럼 완전히 홀로 며칠간 지내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홀로 된 이들이 보여주는 생기를 회복할 시간과 공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러니 일상에서 조금씩 자신만의 시간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혼자 산책을 하거나, 조용한 카페에서 홀로 머무는 정도라도 괜찮다. 홀로 있음으로 회복한 생기는 가족에게도 전달될 것이라 믿는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