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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 쓰는 엄마 Jan 18. 2023

#3. 미국 고등학교 생활의 시작

대망의 미국 고등학교 첫날


교환학생 합격 기준을 통과하면 (2004년 당시 기준 전 과목 최소 '미' 이상, SLEP 일정 점수 이상) 호스트 패밀리 배정을 위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 하는데, 나에 대한 사진과 설명을 넣은 일종의 스크랩북 형식의 자료다. (최근에는 영상을 만든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자료를 보고 호스트 패밀리는 어떤 학생과 앞으로의 1년을 생활할지 결정하게 되는데, 나의 경우 행정 절차가 늦어진 탓인지 포트폴리오가 미흡했던 탓인지 새 학기 시작 이후에도 호스트 배정이 되지 않아 애가 탔었다. 한국 학교에서는 송별회까지 하고서 새 학기 시작 후 한동안 다시 등교를 했다. 나를 보는 친구들 마다 "너 미국 간다고 하지 않았어?" 하고 물어왔는데, 지금 생각하면 다 추억이지만, 어린 마음에 그 당시에는 부끄럽고 머쓱했던 기억이 난다.





교환학생 재단을 통해 선정 호스트 패밀리의 집은 다운타운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서야 나오는 초록 잔디의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 호스트 엄마가 키우는 애완 말들이 뛰어다니는 푸른 목장이 펼쳐진 한쪽 편에 위치한 파란 지붕의 집이었다. 원래 1층인 집을 호스트 아빠인 빌이 2층으로 확장 개조했다고 했다. 호스트 이모와 조카들이 사는 집은 바로 길 건너 맞은편에 위치해 있어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왕래했다. 2층의 나와 룸메이트 방은 아직 공사 중이어서 한동안은 룸메이트와 함께 응접실에서 생활했다.


룸메이트는 브라질 국적의 데니스였다. (Denise, 남자이름 같았는데, 브라질에서는 '데니제'라고 발음하며, 여자 이름이라고 했다.) 그녀도 나와 같은 교환학생의 신분이었고, 나와는 달리 6개월 동안만 머물 예정이라고 했다. 데니스는 전형적인 서양 미녀의 모습이었다. 금발과 브루넷 사이의 긴 머리에 키 크고 늘씬한 체형, 약간의 자연스러운 노출이 있는 화려한 옷에 얼굴에는 항상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나보다 1달 정도 먼저 도착해 이미 적응을 마친 상태였다.


불 꺼진 응접실에서 엄마에게 잘 도착했다고 전화를 걸기 위해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잘 도착했어?"

"엄마..."


엄마의 목소리를 듣자 나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긴 여정으로 피곤하기도 했고, 생각만 해오던 미국 생활을 막상 나 홀로 시작하려니 그제야 덜컥 겁이 났다. 공항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던 당찬 내 모습과는 달리 보고 싶다며 엉엉 우는 내 목소리를 듣자 수화기 너머로 '너무 어린아이를 무모하게 혼자 보낸 걸까' 걱정하고 있을 엄마의 모습이 그려졌다. 내가 선택해서 온 것이니 만큼 성공적으로 마치고 가고 싶었다.


"여기 사람들 다 너무 좋아. 호스트도 친절하고 룸메이트도 너무 좋고... 나 잘하고 갈게."


내가 부모가 되어보니, 그 당시 엄마와 아빠가 나를 연고도 없는 미국으로 홀로 보낸 것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큰 결심이었겠구나 싶다. 엄마 아빠는 그렇게 나를 믿어주고 계셨고,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응원해 주심으로써 사랑을 표현해주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고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나 스스로 해야 해. 내가 원했던 미국 생활이잖아. 잘할 수 있어.


마음을 다잡았다.




여독이 채 풀리기 전 월요일, 드디어 1년 동안 다닐 고등학교인 Taylor County High School(TCHS)에 부푼 마음을 안고 첫 등교를 했다. TCHS는 9~12학년으로 이루어진 900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고등학교였다. 교환학생은 나를 포함해 총 9명이었는데, 그중 한국인은 나뿐이었다.


첫날 문학 시간, 11시 11분이 되자 갑자기 반 아이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향했다.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보며 영어 선생님 미스 에이크리지는 "Yeah, we go to lunch in the middle of class." 라며 나 보고도 어서 다녀오라고 했다. 누구랑 점심을 먹어야 할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른 학생들을 따라 카페테리아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양사가 균형 잡힌 식단을 제공하던 한국 고등학교에서의 급식과는 달리, 피자와 햄버거 같이 전형적인 서양 음식이 담긴 빨간 플라스틱 식판을 보니 새삼 '내가 정말 미국 고등학교에 와있구나' 실감이 났다.


카페테리아는 이미 여러 학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음식을 받아 나오는 짧은 순간 어디에 앉아야 하나, 아는 얼굴이 을 리 없었지만 열심히 눈을 굴렸다. 마침 내가 이곳에서 아는 단 하나의 얼굴, 데니스를 발견했다. 데니스 옆에는 베네수엘라 교환학생 마리아와 일본 교환학생 시호도 있었다. 다들 각자의 이유로 새로운 경험을 위해 이곳에 모였구나. 다른 나라 교환학생들은 왠지 모르게 나보다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점심시간 카페테리아는 참 재미있는 공간이었다. 남의 시선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춤을 추는 아이들도 있었고, 식탁을 둥글게 배치하여 한 명씩 무언가를 낭송하며 점심을 먹는 아이들도 있었다. 함께 모여 자신들의 그림을 자랑하는 테이블도 있었고, 우리처럼 다양한 인종의 학생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도 있었다. 점심시간은 모든 학생이 동일하지 않고 듣는 수업별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중 나는 11시 11분이었다. '다른 교환학생들과 점심시간이 같아 다행이다' 생각하며 나는 별천지에 온 듯 한국과는 사뭇 다른 점심시간 풍경에 두리번거리며 첫날 점심 식사를 마쳤다.


미국에서는 시간표를 짜놓고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수업을 들었는데, 내 하루의 첫 시작은 합창부 수업이었다. 잠이 덜 깬 상태로 합창부 선생님이신 미스 겁틴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보컬 웜업 곡인 "Many Mumbling Mice"를 부르며 목을 푸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문학, 수학, 생물, 미국사, 범죄학 등 여러 수업을 들었지만 음악을 좋아했던 나는 하루의 끝도 음악이었다. 마지막 교시는 오케스트라 밴드 수업을 들었다.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었지만 굳이 밝히지 않고 퍼커션(percussion)을 맡았는데, 후에 내가 음악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을 알게 된 음악 선생님 미스터 파머는 나에게 마림바(marimba)와 비브라폰(vibraphone) 연주를 맡겨주셨다. 연말에는 같이 퍼커션을 하는 지니라는 친구와 함께 크리스마스 콘서트에서 내가 메인 멜로디를 맡은 비브라폰+마림바 듀엣 공연도 했다.




한국 친구들이 책상에 앉아 열심히 수능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동안 나는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적응하는 법을 익히고 학기 별로 합창, 오케스트라 공연을 하며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한국에서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공부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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