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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 쓰는 엄마 Feb 02. 2023

#5. 유럽 교환학생들과의 대립 (2)

적반하장-대체 내가 뭘 어쨌길래 그래?



손에 땀이 나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한국에서는 발표를 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있다고 해도 초등학교 때 정도가 다였던 것 같다.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도, 배우지도 않았던 발표를 파란 눈의 외국인들 앞에서 그들의 언어로 해야 한다니, 태연한 듯 앞 조의 발표를 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완벽하게 준비한 다른 조의 발표자료를 보자 의자 속으로 파고들어 갈 듯 주눅이 들었다.


우리 조의 발표 차례가 왔고, 존과 친구들이 먼저 나가 요약한 내용을 읽어나갔다. 그리고 곧 미스 에이크리지가 나에게 큐 사인을 보내왔다. 나는 준비해 온 포스터를 주섬주섬 펼쳐 보였다.


"한국 교실에서는 이런 방식의 발표를 잘 하지 않는다고 하여 '포스터에 한국어를 적어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주었어요. 틀에 박힌 빽빽한 글씨의 포스터보다 이런 색다른 포스터를 경험하는 것도 좋은 교육이 될 것 같아서였죠. 자, 그럼 설명을 해주겠니?"


미스 에이크리지가 나에게 윙크를 하며 친절한 인트로를 해주셨다.



발표 이틀 전 문학시간, 울음을 터뜨린 나를 보고 미스 에이크리지는 다음 수업 담당 선생님에게 전화를 하셨다. 그리곤 다음 수업에 조금 늦게 들어간다고 전달해 놓았으니 편히 이야기를 하자며 나를 다독여주셨다. 전후 상황을 설명하자 "독일 사람들이 직설적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다"며, 나쁜 뜻은 없었을 것이라 나를 위로해 주셨다. 그리고는 나만의 방식으로 한국어를 포스터에 적어 친구들에게 한글을 알리는 것은 어떻겠냐고 조언을 해주셨다.



"저는 아직 영어로 된 내용을 읽는 것에 서툴러서, 윌리엄 버드의 책 제목을 Korean alphabet 인 '한글'로 적어보았습니다."


윌리엄 버드의 대표작인 <경계선의 역사 The History of the Dividing Line>을 커다랗게 한글로 그려놓은 포스터를 떨리는 손으로 가리키며, 어색하게 한 마디를 내뱉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한 아이가 정적을 깨고 말했다.


"That's cool!" (멋진데!)


생각했던 것보다 미국 아이들은 한글에 관심을 보였고, "꼭 그림 같다"며 한글을 멋진 예술품 바라보듯 신기해하며 바라보았다. 한글어떻게 읽냐고 물어보는 아이도 있어서 한국어로 읽어주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고는 자기 이름을 한글로 어떻게 쓰는지 물어보는 친구들도 있었다.

(후담인데, 그 포스터는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고도 한동안 문학 교실에 걸려있었다고 한다.)


미스 에이크리지의 조언과 격려 덕분에 미국에서의 첫 발표를 무사히 끝낼 수 있었지만, 호스트 엄마는 이 일로 인해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다. 올리비아와 존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다는 고민을 토로했던 적이 있어 가뜩이나 유럽 교환학생들에 기분이 상해있던 터였는데 이번 일까지 겹치자 호스트 엄마는 교내 학생지도 상담사에게 연락을 했다.



하루는 수업을 듣고 있는데 나와 데니스, 시호를 부르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상담실에 도착하니 시호와 데니스도 뒤이어 나타났다. 학생지도 상담사의 이름은 'Young'이었는데 (미스 영이라고 불렀다), 귀찮은 일이 하나 터졌다는 표정으로 학부모 상담 일지를 우리에게 읽어주었다. 나의 고민을 전해 들은 호스트 엄마가 미스 영에게 이 상황을 전달했고 조치를 취해달라고 했던 것이었다. (나는 당시 호스트 엄마가 연락했던 사실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괜히 크게 키우고 싶지 않은 마음에 "우리가 영어가 미숙해서 그렇게 느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이 의도했던 것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등의 미사여구를 구구절절 달아보았지만 미스 영은 흘려들은 듯 일단 알겠으니 수업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잠시 뒤 또 한 번의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올리비아와 존 학생은 지금 바로 학생상담실로 오세요."

 



그날 점심시간. 올리비아는 언짢은 표정을 하고 나와 시호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와 무섭게 쏘아붙였다.


"대체 나한테 왜 이래?"


우리가 불려 간 직후 올리비아와 존이 불려 갔던 것으로 보아, 상담실에서 한 소리 들은 듯했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곳이었는데 말이다.) 무슨 말이냐고 잡아뗄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해였다면 풀고 싶었고, 무엇보다 이런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차분하려 애쓰며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가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고 해도 너에게 직접 이야기를 했었어야 했는데 이런 식으로 전달이 되어서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해. 그렇지만 네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우리는 무시당하는 기분을 느꼈었어."


올리비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뭘 어쨌길래 무시당하는 기분을 느껴? 교환학생 세 명이 와서 이야기했다는데, 너랑 시호랑 데니 스겠지. 데니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너희랑 어울리니까 편들어준 거겠지. 난 억울해."


"너에게 그런 의도가 없었다면 '오해였으니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하다' 사과하고 다 같이 잘 지내면 되는 것 아냐?"


나도 울컥하여 언성을 높이자, 이제 막 음식을 받도가 끼어들었다. 알도는 얼마 전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새롭게 합류한 멕시코에서 온 학생이었다.


"Just be nice to them. They just want to be your friends."

(올리비아와 존에게 좀 친절하게 대해줘. 그들은 너의 친구가 되고 싶은 것뿐이잖아.)


알도의 말에 문득 전후 사정을 모르는 제3자가 현재 상황만 본다면 마치 내가 올리비아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테리아라는 오픈된 공간에서 올리비아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고 나는 언성을 높여 다투고 있었으니 말이다.


감정이 격해질 것 같아 대화를 중단하고 그만 그 자리를 떴다. 내 뒤로 나를 노려보는 올리비아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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