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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렌 Sep 08. 2022

혹독한 우울의 계절을 지나며

#그림수필, 동해 윤슬의 반짝임에 한없이 매료되는 날

  세상만사가 사람 마음먹기에 달렸다지만, 지독한 우울의 계절을 지나고 있는 사람은 그 마음 먹기조차 쉽지 않다. 전쟁과도 같은 인생살이에 지쳐 벼랑 끝에 내몰린 나는 나 혼자서는 도저히 답을 낼 수가 없어 주변에 도움을 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울의 심해에 처박힌 나를 도울 수 있는 건 오로지 나 자신이다. 부모도 친구도 직장 상사도 심지어는 의사조차 나를 구하지 못했다. 나는 우선 나의 삶을 일주일만 멈춰보기로 다짐한다. 그렇게 떠난 여름휴가, 나는 쉴 새 없이 몸을 놀린다. 홀로 가는 국내 여행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24인치 캐리어를 드르륵드르륵 끌며, 버스에 오른다. 캐리어 속의 4분의 3이 화구인 사생 여행. 나는 그렇게 여름 바다로 떠났다.


  해안가 시골 마을은 여름휴가 시즌임에도 불구하고 길거리에 사람이 적었다. 혼자 사색을 즐기기엔 제격인 곳이다. 바다엔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이 제법 많지만, 개천의 다슬기처럼 다닥다닥 붙은 파라솔 구간을 지나면 푸른 바다를 오롯이 홀로 감상할 수 있는 곳도 있다. 그뿐이랴, 18시를 지나면 해수욕장엔 수영을 허락 받지 못한 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안전 요원만이 장난감 같은 전동차를 타고 새하얀 모래사장을 누빈다. 그럼 나는 그 시간대에 맞추어 삼각대와 이젤 박스를 펼치고, 다소 후텁지근한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마주하며 물감을 짠다. 내가 좋아하는 푸른색 물감을 종이 팔레트 위에 아름답게 수놓고 잠시간 감상에 빠진 후, 붓을 놀린다. 사람들의 관심이 어색하고 부담스러운 나는 해변을 거니는 관광객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그렇게 계속해서 나무 화판 위로 붓질을 해나간다. 결과물이 비록 내 마음에 쏙 들지는 않더라도, 고급 안료로 빚어낸 유화 물감이 자아내는 색상만큼은 내 심장을 뒤흔든다. 바다는 쉴 새 없이 파도를 일으키고, 타들어 가는 햇빛 아래로 유영하며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인다. 열사와 같은 더위가 있기에 여름 바다가 더 반짝이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그 반짝임을, 물의 거센 움직임과 포말을 화판 위에 올리려 안간힘을 쓴다.

  오랜만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보조제 없이 물로 개어 하얀 공간을 채우면 금세 말라 후처리하기 쉬운 아크릴 물감의 편리함에 취해 한동안 유화를 잊고 살았다. 하지만 미끌미끌한 기름으로 뻑뻑한 물감을 살살 달래가며 캔버스를 채워나가는 감각을 나는 열렬히 사랑했다. 짧지 않은 시간 내에 물감을 겹쳐 올리면 자연스레 섞여나가는 안료. 누군가는 이 속성이 매우 성가시겠지만, 나는 말할 수 없이 소심한 인간이다. 몇 번이고 원할 때마다 다시금 수정할 수 있는 유화가 편안하고 사랑스럽다. 우리네 인생 또한 이렇게 몇 번이고 덧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 않아도 될 텐데. 그러나 우리 생명은 유한하다. 한 떨기 꽃과 같이, 화려하게 피어나는 시간 또한 짧다. 물론 만사 늦은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걸어온 길을 수정할 수는 없다.


낙산해변 (이세렌 作) 나무화판에 유채 225*300mm On sale


  그렇게 해가 지고 밤이 된다. 4년 전 이맘때에 일본 홋카이도의 오타루 운하를 작은 배를 탄 채 짧은 시간 유람하던 것이 생각난다. 나는 그때 처음 깨달았다. 바다 공포증이 있다는 것을. 그중에서도 밤바다는 최악이라는 것을. 조용히 운하 위를 떠다닐 때까지는 몰랐던 공포가, 바다로 나가는 순간 내 몸을 엄습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수평선조차 컴컴해. 검은 바다 위에서 나는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숨도 쉴 수 없었다. 재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저 그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의 오금을 저리게 했던 자연의 위대함. 내 우울이란 가히 이에 비견할 수 있다. 나는 바다를 표현의 대상으로 깊이 사랑하고 있지만, 매서운 두려움 또한 함께 느낀다. 내 우울은 그 너울이 약할 때는 삶의 조미료 내지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나, 격랑으로 변했을 땐 너무나도 가혹해 나 자신을 잃어버린다. 단단하게 굳어가는 심장, 호흡할 수 없는 허파. 그러나 생이 끝나지 않는 이 감각. 무한한 고통 속에 버려진 나의 자아. 이를 보고 내 초자아가 비웃는다. 너는 어차피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인간이라고. 그렇게 조롱하며 쾌감을 느끼는 나의 철천지원수―.

  그를 떠올리며 나는 이젤을 접는다. 두 손에 잔뜩 묻은 끈덕진 물감을 수건으로 닦아내면서. 그림만이 나의 이유다. 내가 존재하는 까닭. 내가 오랫동안 갈구해 마지않던 인생의 과업. 나는 너를 언제쯤 내 손으로 움켜쥘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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