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할머니 집에 갔더니 문에 등기가 하나 붙여져 있었다. 보낸 사람도, 받는 사람도,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하얀 봉투 속 종이를 펼쳐 읽어보았다. 아주 깔끔하고 정제된 단어들과 정중한 문체로 이루어진 제안서였다. 채권금액 200,000,000원, 강제경매, 대위변제, 그리고 낯선 이름들이 가득한 내용을 보니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옆에 앉아있던 할머니는 “그거 뭐고? 뭐라 적혀있나 함 줘봐라.” 한다. 할머니는 치매 예방에 좋다며 불경이나 TV 속 자막을 천천히 읽으시곤 한다.
“아니, 됐다. 이런 거 읽을 필요없다.”
말이 들리지 않는지 얼른 줘보라고 하는 게 유독 답답한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귀가 어두우시니 더욱 크게 말씀드려야겠다는 명분으로, 잡친 기분을 차디찬 물 속으로 던져버린다. 아니, 패대기치는 게 맞겠다. 그러고는 마음이 심란할 때, 큰 일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속으로 읊으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불경 속 광명진언을 오랜만에 머릿속에서 꺼내보았다.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를타야 훔’
나중에 알아보니 그건 우리 집안과 관계없는 일이어서 그냥 잊어버리고 말면 그만이었다. 그렇지만 처음 그 종이를 펼쳐보았을 때 목덜미가 급격하게 서늘해지는 섬뜩한 느낌은 쉽사리 잊어버리기 힘들 것 같다. 돈은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그깟 종이쪼가리 몇 장이 한 개인의 인간관계를 파멸로 몰고 간다는 사실에 화도 많이 나고 사람이 이렇게나 나약한 존재인가 싶기도 한다. 무력감을 느낀다.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맞다. 그래도 삶이란 종이에 그려왔던 모습들을 쓰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 우리의 인생과 구분할 줄은 알아야지. 같은 것이라고는 고작 종이라는 것 하나. 돈은 보다 좋은 잉크로 근사한 내용을 써내려갈 준비물에 불과해. 돈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야. 종이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야. 낯설고, 섬뜩하고 가면을 쓴 단어들 대신 뻔하고 쉬운 단어들을 지저분하게 써내려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