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시대 폰지투자자의 초상
좀비는 수퍼히어로나 외계인과 함께 현대인이 사랑하는(?) 초현실적 상상물이다. 좀비라는 말은 남미 부두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의식이나 감각이 마비된 채, 걷고 간단한 작업을 할 수 있는 존재일 뿐, 최근의 좀비물처럼 사람을 물어뜯고 감염시킨다는 속성은 없었다. 이것은 현대 영화가 만들어낸 신종 장르다. 좀비가 현실에 등장할 가능성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광견병 바이러스, 뇌염 바이러스, 독감 바이러스 등이 결합하면 가능하다는 얘기가 있지만 호사가들의 상상력에 불과하며 과학적 기반을 갖춘 얘기는 아닌 듯 하다.
별다른 과학적 근거도 없고, 물리면 전염되는 드라큐라에 비해 큰 차별성도 없는 좀비 장르가 이렇게 큰 인기를 끌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한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유는 이 장르가 인간의 파괴욕을 대리 충족시키는 데 적합하다는 것이다. 좀비 하나가 사람을 물면 몇십분, 몇시간내로 물린 사람도 좀비가 되므로 좀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식한다. 이들은 두뇌를 파괴하는 잔혹한 방식으로만 죽일 수 있는데, 가슴에 말뚝을 박는 드라큐라 방식보다 보다 현대적이고 또 효율적이다. 무수히 밀려드는 좀비를 연발총으로 박살내는 것은 박진감 넘치는 고화질 게임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대상이 실제 사람이라면, 심적 부담이 있겠지만, 좀비는 사람이 아니다. 죽은 자를 또 죽일 수는 없으니 이것은 살인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현대 좀비 장르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좀비를 자연과학적으로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다면 역시 사회과학적으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좀비는 살아 있는 사람의 고기라는 목표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존재다. 이들에게 다른 모든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거기에 공격당한 사람은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 한, 똑같은 존재가 되어 또 다른 사람에게 달려든다.
폰지 사기라고 불리우는 피라밋 사기는 자본주의가 성장하던 20세기 초반에 등장했다. 투자라는 것은 실제 이익을 올릴 수 있는 기회에 자신의 자금을 투입하고 그로부터 이익을 배분받는 것이다. 찰스 폰지는 무리한 투자 기회를 과장 광고하여 일단 초기 투자를 받았다. 그는 이들에게 약속한 이익을 돌려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더욱 광고를 강하게 하여 후속 투자자들의 투자를 받고 이 돈을 초기 투자자에게 이익으로 배분하였다. 막대한 이익률의 약속과 1차 투자자에 대한 약속의 이행은 사회적 관심의 불을 당겼다. 그 결과 너도 나도 폰지에게 투자하려는 광풍이 불었다. 폰지는 어렵지 않게 3차 투자자로부터 돈을 받아 2차에게 배분하고, 4차로부터 돈을 받아 3차에게 배분하면서 점점 더 명성을 올렸다.
그러나 지구상의 인구가 유한한 한 이런 방식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의심의 싹이 일어나고 문제 제기가 시작되면서 이번에는 갑자기 의심이 확산되었다. 이제 반대의 광풍이 몰아친다. 서로 먼저 자신의 투자금을 회수하려고 모두 폰지에게 달려간다. 추가되는 투자 자금의 유입이 없는 한, 폰지의 금고는 금방 바닥나고 거의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투자금을 한 푼도 건지지 못한다.
처음 투자를 할 때나 투자자금을 회수할 때나 사람들은 이성을 잃는다. 꼼꼼하게 따져보고 상황을 분석해 보는 이성은 마비된다. 오직 남들보다 늦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밀쳐내서라도 앞서야 한다. 앞서면 살고 뒤쳐지면 죽는다. 죽기살기의 경주가 시작된다.
주류 경제학에 따르면 시장경제는 네거티브 피드백에 의해 항상 균형에 도달한다. 즉 밥을 먹으면 먹을수록 효용의 증가는 떨어진다. 배가 불러지기 때문이다. 생산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생산을 더 많이 하면 할수록 생산성은 저하된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는 저절로 균형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무리하게 소비하면 배탈이 나고 무리하게 생산을 하면 기계가 삐꺽거린다. 그러면 저절로 시장 균형에 의해 절제와 조화가 달성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는 이런 낙관론을 비껴간다. 밥은 많이 먹으면 배불러서 더 먹기가 힘들지만 화폐는 그렇지 않다. 화폐의 한계효용은 줄어들지 않는다. 더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 큰 파워가 생기고 지배력이 커진다. 또한 경쟁이라는 것이 있다. 경쟁은 적당한 선에서 멈추는 것을 방해한다. 나는 이 정도로 만족하고 싶은데 사회 전체적으로 평균이 올라가면 나는 또 뛰어야 한다. 이러한 몰아세움이 사람들을 계속 극단으로 몰고 가고 이를 제어할 장치는 무력화된다.
그 결과 경제는 균형을 잃고 극단으로 치닫는다. 그런데 우주가 유한한 한 이런 식의 기하급수적 증가는 멈출 수 밖에 없다. 그 결과는 버블 붕괴와 같은 파멸적인 균형 회복이다. 주가가 오르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주가가 더욱 오를 것으로 기대하고 급격하게 투자를 늘인다. 위험을 회피하던 사람조차 주변 모두가 그렇게 움직이면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는 더욱 더 빠른 주가 상승이다. 그러나 주가는 어디까지나 기업의 생산력, 이익력의 반영일 뿐이다. 유한한 실체가 무한히 긴 그림자를 가질 수 없다. 결국 균형은 모든 것의 붕괴라는 형태로 회복된다. 이때 소위 뱅크런이 벌어진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마지막 폭탄을 누군가 남에게 떠넘기려고 한다.
경제에서의 버블은 좀비 현상과 많이 닮았다. 일단 벌어진 투자 광풍은 사람들의 이성을 눈 멀게 하고 모두가 한 방향으로 달려가게 한다. 폰지 사기처럼 한 투자자의 이익은 다른 투자자의 투자금이다. 좀비는 다른 사람의 고기를 먹고 겨우 허기를 달랜다. 고기를 먹힌 사람은 그 자신도 좀비가 되어 다른 사람, 즉 후속 투자자의 투자금을 삼키려고 한다. 그러나 이 허기는 결코 채워지지 않고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 배고플 뿐이다.
버블이 붕괴하고 모두가 자신의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뛰는 모습은 굶주린 좀비들이 한 무리의 사람을 발견하고 이를 물어뜯으려 뛰어가는 모습과 비슷하다.
좀비는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모순의 "다크 패러디"라고 할 수 있다. 드라큐라처럼 역사나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저명한 악마"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평범한 그 누구라도 식인귀로 돌변하는 '익명의 공포'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이성은 이러한 집단 역학 앞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다. 좀비 한 명 한 명의 머리를 쏘아 맞추는 명사수가 되기 보다는 이러한 집단 역학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이를 막기 위한 체제의 개선을 진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좀비 장르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경고를 조금 더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