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공식 리더의 존재감
현대 사회는 막대한 데이터와 통신의 양에 걸맞게 엄청나게 다양한 스토리를 소비하고 있다. 그런 스토리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 하나는 수퍼히어로물이다. 수퍼맨, 배트맨, 아이언맨 등의 수퍼히어로들은, 그 배후에 과학적 배경을 깔고 있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는 과거의 신과 영웅, 즉 길가메시나 헤라클레스 또는 토르나 로게를 연상시킨다. 능력의 황당무계함, 그리고 스토리의 자유분방함은 수퍼히어로가 한 술 더 뜨면 떴지 모자람이 없다. 최근 헤라클레스나 페르세우스 등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새롭게 많이 만들어졌지만, 그 반응은 수퍼히어로물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인 듯 하다. 이들은 진정 우리 시대의 신화 전설이 되고 있는 것일까?
본격적인 SF팬들이라면 수퍼히어로물이 SF 장르에 속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기도 한다. SF란 과학적인 근거가 뚜렷해야 하는데 수퍼히어로들의 능력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수퍼맨이 하늘을 나는 동력은 무엇일까. 설마 펄럭이는 망토는 아니겠지…
물론 20세기 초에 만화로 발표된 초기 수퍼맨은 나름 과학적 설명을 갖추고 있었다. 수퍼맨은 크립톤 행성 출신인데 크립톤의 중력이 지구의 몇십배에 달한다는 것이다. 지구에 사는 우리가 달에 가면 몸이 6분의 1로 가벼워져서 엄청난 점프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런 설명으로는 수퍼맨이 높이 뛰는 것은 설명할 수 있어도 하늘을 나는 것까지는 곤란하다. 암스트롱도 달을 날아다니지는 못했으니까…
과학과는 거리가 먼 마법적 세계관이 대중의 B급 정서를 파고 들어온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들린다.
“수퍼히어로 영화를 무비판적으로 소비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지속적으로 코카콜라를 먹이는 것만큼 위험하다.” (최한욱, [영화로 세상읽기] 슈퍼히어로의 정치경제학)
수퍼히어로의 의미를 자연과학에서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과학에는 자연과학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과학은 어떨까.
영화 <언더 더 세임 문>에 나오는 그룹 킹키의 노래 “불법체류자 슈퍼맨”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슈퍼맨은 어떻게 일할 수 있나?
주민등록번호도 없고, 영주권도 없는데
슈퍼맨은 어떻게 날지?
면허증도 없는데
그래서 슈퍼맨인가?
…
매일 열나게 쫓기는 슈퍼맨과 나는 같은 처지
(Kinky의 “Superman Es Ilegal”)
슈퍼맨은 크립톤 행성 출신으로 지구인이 아니다. 따라서 그는 불법체류자다. 혹자는 엄청난 부자인 배트맨이나 아이언맨에 비해 슈퍼맨이 지구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정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배트맨의 경우도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어둠 속에서 활동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대부분의 슈퍼히어로는 이중자아를 가지며, 이런 점에서는 정부와 공식적 협력 관계를 구축한 아이언맨이 예외에 속한다. 그러나 아이언맨 역시 정부 조직의 일원이 아니며 민간인으로서 어느 정도는 거리를 두고 있다.
슈퍼히어로의 이와 같은 ‘국외자 정서’는 이들의 스토리가 사회학적 의미를 띠도록 만든다. 최근의 히어로물은 이런 고립감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다. 히어로는 권력의 강력한 동반자가 되기도 하지만, 권력이 의심스러워질 때 긴장 관계에 들어가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과거 봉건 시대의 ‘의적물’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부패한 권력에 희생되는 서민들의 꿈이 빚어낸 존재, 메시야가 되는 것이다.
더 중요한 테마는 스스로의 엄청난 능력으로 인해 사회적 관심의 초점이 된 히어로들이 대중과 맺는 관계, 또 소통 과정 중에서 미디어의 역할이다. 스토리 초기에 히어로들은 약자를 보호하고 악당을 징벌하면서 큰 인기를 얻지만, 사건이 전개됨에 따라 대중의 오해를 받거나 심지어는 증오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 히어로들은 물리적 힘과는 달리 심리적 약점을 드러내고 이로 인해 변덕스런 대중과 긴장 관계에 놓인다. 이것은 스타와 대중의 불안정한 관계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악당과 싸우되 전면에 나서지 않고 측면 지원을 하는 국외자적 속성은 영웅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중요한 모티브다. 슈퍼히어로들은 결코 정규군의 리더가 아니다. 영국 경찰보다 훨씬 더 뛰어난 추리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조용히 배후에서 사건을 처리하고 경찰에 공을 돌리는 셜록 홈즈의 모습도 떠오른다. 외적 보상보다는 사건 처리 그 자체에만 몰두하는 모습이야말로 슈퍼 히어로의 매력의 원천이다. 슈퍼맨은 철저하게 왼 손이 한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그 비밀을 밝힌다. 로맨틱하기까지 하다.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 어마어마한 능력을 보유하고도 경쟁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남을 위해 일한다는 특성이야말로, 세계와 미녀를 정복하던 전통적 영웅과의 차이점일지도 모르겠다. 공식 리더와 비공식적 리더의 분열을 언급한 것은 현대 조직이론의 거장인 에치오니이다. 그는 조직이 공식화될수록 조직을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리더와 구성원의 마음을 얻는 리더가 나뉘어진다고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감옥이다. 교도소장은 죄수들의 공식적 리더이지만, 죄수들의 마음을 얻는 리더는 옥중 어딘가에 따로 있다.
구성원이 공통의 목적에 공감하고 자발적인 협력관계를 이룰수록 공식 리더와 비공식 리더의 거리는 줄어든다. 반면 집단과 개인간의 공감이 저하될 때 비공식 리더의 존재 의의는 더욱 커진다. 슈퍼히어로물이 이렇듯 환영받는 오늘의 세태는 공권력을 그다지 신뢰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정서를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