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과 현실의 관계
일본의 만화이자 실사 영화로도 대성공한 <데스노트>는, 노트 위에 이름을 적으면 죽는다는 터무니 없는 설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평범한 대학생 야가미 라이토의 눈 앞에 밑도 끝도 없이 떨어진 이 노트는, 과학적 설명 따위는 아예 무시한, 중세의 마법과 같은 세계관을 드러낸다. 저주할 대상의 손톱이나 머리카락을 인형에 집어 넣고 꿰맨 뒤, 바늘이나 송곳으로 찌르면 그 대상에게 같은 해가 가해진다고 생각한 부두교 미신과 다를 바가 없다.
17세기 유럽에는, ‘무기 연고’라는 약이 유행하였다. 이것은 칼에 상처를 입었을 경우, 상처가 아니라, 상처를 낸 칼에 발라도 치료가 된다고 알려진 약이었다. 병사가 20마일이나 떨어져 있어도, 병사를 찌른 칼에 무기 연고를 바르면 병사를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의 저명한 지식인 파라켈수스가 진지하게 이 약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21세기다. 무기연고만큼 황당한 데스노트는 어떻게 현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일까.
데스노트를 하나의 비유로 생각하면 ‘살생부’가 연상된다. 대상의 비공개적인 제거, 살인자가 드러나지 않는 살인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수의 타겟을 대상으로 한 의도된 살해 공작으로 매스컴에 노출된 악인을 처단하는 데스노트의 설정과는 차이가 있다.
이런 면에서 더욱 유사한 것은 SNS에서 벌어지는 ‘익명의 악플’이다. 온라인 공격은 노출되지 않은 장소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만으로 이루어진다. “키라(킬러라는 영어 단어의 일본식 발음)”라는 가명으로 악당들을 살해하는 데스노트의 주인공 라이토는 정의의 이름으로 이를 행하지만, 공격 대상은 언론 보도 등 피상적인 정보에 의존한다. 희박한 근거로 혼자서 분노하고 혼자서 분출하는 악플러의 모습과 가깝다.
라이토가 신비스런 원격 조작에 의해 살인을 한다는 것을 깨달은 탐정 L은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라이토의 방 곳곳에 CCTV를 설치한다. 그의 살해 수법을 알아내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끼로 사회적 지탄을 받는 인물의 뉴스를 TV에 내보낸다. 만약 라이토가 노트에 이름을 쓰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고, 대상 인물이 죽는다면 결정적 단서를 잡게 될 것이다. 그러나 라이토도 만만치 않다. 그는 다른 대응 수단을 동원한다. L과 키라의 두뇌싸움은 점점 더 치열해진다.
L과 라이토의 숨박꼭질은 IP를 변경해가며 정체를 숨기는 악플러와 이를 뒤쫓는 사이버 수사관의 대결을 연상시킨다. 마법에 가까운 데스노트의 설정이 현대의 통신 기술과 접목되는 대목이다. 과거 사람들이 마법으로 생각하던 많은 기술들이 현대 과학으로 현실이 되었다. 팬터지의 설정이 과학 기술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왔다는 것은 많은 사례로 입증되고 있다.
터무니 없는 상상이 우리 현실의 비밀스런 모습들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다. 우리 눈에는 일상이 익숙해 보이지만 엉뚱한 상상은 보는 방식이나 시점을 변화시켜 사물의 진상을 드러낸다. 기괴하고 낯선 상상 세계라도, 인간의 상상인 한, 현실과 완전히 무관할 수는 없다. 상상과 현실은 겉보기만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빛과 그림자처럼 얽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