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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반진반 Mar 15. 2023

명료한 드라마 <더 글로리>가 복잡해진 이유

폭력의 역사

복수극이라는 게 그렇다. 피해 vs 복수, 양쪽의 분량과 강도가 적절해야 한다. 피해 쪽이 크면 클수록 복수의 쾌감이 비례하지만 그러면 보기가 너무 힘들다. 그렇다고 피해를 약하게 묘사하면 복수에 대한 정당성도 같이 약해진다. 당연히 쾌감이 줄어든다. 물론 (의도적으로) 복수를 핑계로 강간 포르노를 찍는 경우도 있고, 거꾸로 복수의 쾌락 극대화 한 포르노도 많다.


<더 글로리>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강도 높은 피해(학폭)를 전시하고 주인공을 극단적인 인생의 나락으로 추락시킨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복수에 들어가는데, 그 복수가 꽤나 정교하게 설계돼 있어 짜릿하다. 다만 복수의 대상, 가해자들이 하나 같이 멍청하고 나약해서 큰 긴장감은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가해자들은 기껏해야 돈 많은 졸부들에 불과하다.  복수자들(문동은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이 오히려 더 강력하다.


당연히 의도한 설정이다. 가해자가 너무 강하면 복수가 용이하지 않다. 복수에서 좌절이 너무 크면 쾌감이 줄어든다.


사적 응징에 대한 고민도 너무 크면 안 된다. (<친절한 금자씨>의 경우 사고 게임이 복잡하게 설정돼 있다. 보다 보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생각이 많으면 시원한 복수는 불가능하다. 단순하게 직진. 드라마의 작전이었고 크게 성공했다.


윤석열 정부의 고위 공직자 아들이 저지른 학폭 덕분에 <더 글로리>는 애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현실감을 획득하는 행운을 얻었다. (드라마 자체도 재미있지만) 학폭 가해자와 정의롭지 못한 한국 사회에 이미 분노하고 있던 (나 같은) 대중은 드라마에 더 열광했다. 현실과 허구의 상승작용이란 바로 이런 거 아니겠나.  


그런데.


단순하고 명료한 장르물인 <더 글로리>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한국 사회의 복잡한 구도를 몸소 시전하고 복수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던진다. 드라마의 피디가 과거 학폭(혹은 폭행) 가해자였다는 사실이다. “학폭(을 응징하는) 드라마의 크리에이터가 학폭 가해자”라는 구도는 한국판 <폭력의 역사>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지금까지 나온 사실 관계는 이렇다. 드라마가 인기를 끌자 피디가 과거 학폭 가해자라는 주장이 나왔다. 피해자는 과거 중학생일 때 고등학생인 피디와 그 친구들에게 집단으로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피디의 여친이 같은 중학생이었고 자신과 동급생들이 그 여친을 장난 삼아 놀렸는데, 피디가 보복을 했다는 거다. 피디는 부인했다. 추가 폭로가 나왔다. 당시 여친도 등판했다. 피디가 아니라 피해호소인(?)의 주장을 지지했다. 피디는 결국 사과했다.


양쪽을 지지하는 주장이 팽팽하다. 피디 쪽 지지자들은 이렇다. 피해호소인이 먼저 피디 여친을 놀렸으니 먼저 학폭을 저지른 거다. 따라서 피디는 피해호소인의 학폭을 응징하는 정당한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물론 이 주장의 맹점은 피디의 전 여친이 동급생들의 놀림을 단순한 장난이었다고 규정한 부분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대쪽은 뭐가 어찌 됐건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원칙적인 입장이다. 게다가 고등학생이 중학생을, 그것도 집단으로 폭행한 건 그 자체로 학폭이라는 말이다. 피디가 사과를 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는 분위기다. 당시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어느 정도 수위의 폭행이 있었는지 이제 확인하기는 어렵게 됐다. 피해호소인의 주장만 남았을 뿐이다.


여기에서 학폭의 전형적인 쟁점들이 모두 튀어나온다. 드라마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질문들이다.


1. 맞은 쪽이 맞을 만했던 건 아닌가?

2. ‘아이들끼리의 싸움’과 학폭의 경계는 어디인가?

3. 일회적인 폭행은 학폭과 다른가?

4. 어린 시절의 ‘실수’는 어디까지 용인되는가?

5. 학폭에 대한 사적 응징은 정당한가?  

6. 학폭에 대한 처벌은 공소시효가 있는가?

7. 학폭에 대한 징벌의 수위를 결정할 때 피해자 주관적인 만족도는 고려의 대상인가?

8. 결정된 징벌의 수위에 피해자가 동의하지 못한다면 사적 복수는 정당화되는가?


질문은 도돌이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한다.


먼저 구체적 사안에 대해서 시시비비를 명확하게 가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드라마는 명확하게 화면으로 보여주지만 현실에서는 각자의 이야기를 듣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당사자의 증언은 엇갈릴 것이고 목격자의 진술도 단일하기 힘들다. 서로 각자의 정당성을 주장할 것이고, 처벌의 수위에 대한 의견도 백이면 백 다를 것이다. 이런 복잡하고 미묘한 과정에 당사자와 제삼자가 개입하게 된다. 그 개입에 힘의 역관계가 다시 개입한다. 돈과 권력과 인맥과 사회적 자산이 영향을 미친다. 어떤 사람은 그래서 빠져나가고, 어떤 사람은 덫에 빠진다.


가정을 해보자. <더 글로리> 피디가 명백하게 과도한 폭행을 저질렀다면, 그래서 폭행 피해자가 당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고, 이후 정상적인 인생을 살지 못했고, 피해자가 먼 훗날 통쾌한 복수를 실행했다면. 그건 정당한 복수인 걸까. 그 정당성은 누가 결정하는 것이고 어떻게 확보되는 것일까. 공권력이 그 복수의 불법성에 눈을 감는 것은 과연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일까.


이 와중에 학폭 가해자가 학폭 드라마를 제작하는 것은 용인될 수 있는 일일까. 거기에 우리는 거리낌없이 열광할 수 있을까. 늦었지만 가해자가 사과를 하면 정의는 실현된 것일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대답은 허공을 맴돈다.


학폭을 저지른 검사 출신 정순신의 아들은 서울대에 갔지만, 결국 사건 다시 불거져서 정순신은 국가수사본부장에서 낙마했다. 이제 정의가 실현된 것일까. 아니다. 아마 정순신은 변호사로 잘 먹고 잘 살 거다. 아들은 서울대를 나올 수도 있고, 아마 문제가 있으면 유학을 갔다 와서 역시 잘 먹고 잘 살 거다. 그래서 우리는 <더 글로리>를 꿈꾼다. 그 장르적인 판타지에 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우리는 정순신과 그 아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더 글로리>가 일깨운 학폭에 대한 대중적인 분노도 오래 가지 않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더 글로리>는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드라마 외적인 부분으로 일깨워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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