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로 자전거를 시작한 뒤 나의 시야는 바닥 위에서 안장 위로 바뀌었다. 지나가다 자전거가 지나가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따라 돌아가고, 예쁘거나 값비싼 자전거를 보면 가던 길도 멈추고 살피게 되었다. 점점 남의 자전거에도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 세상엔 어마어마하게 비싼 자전거가 많고, 보통 직장인 월급보다 비싼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우리나라에도 굉장히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처음에는 백만 원을 넘는 자전거를 탄다는 게 이해가 안 되었다. 그나마 백만 원 정도야 오십만 원씩 두 달 저금하면 모을 수 있다지만 동호인들이 타는 자전거 중 이백만 원, 나아가 오백만 원을 넘는 자전거도 심심찮게 있었다. 처음에 삼십만 원짜리 자전거를 타던 나는 내 눈높이에만 딱 맞춰서 ‘저런 건 사치야.’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는 게 점점 익숙해지고 남들만큼 근력이 붙자 그때부터 새로운 시야가 열렸다. 분명 힘은 비슷한 것 같은데 남이 더 빠른 건 자전거 탓 같았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어봐도 타이어 폭이 좁은 로드자전거가 같은 조건에서 더 빠를 수밖에 없고, 같은 로드자전거라면 체중과 자전거 무게가 가벼운 쪽이 오르막길에서 힘을 덜 들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나는 큰 깨달음을 얻고 곧바로 나아질 수 있는 길을 택했다. 하이브리드 자전거를 로드자전거로 바꾸고, 무게도 수 킬로그램이나 줄였던 것이다. 그리고 약 일 년 뒤, 나는 결국 이백 만원이 넘는 자전거를 새로 사게 되었다.
한마디로 빨라지고 싶었다. 하루 이틀 타다 보니 빨라졌지만 더욱 빨라지고 싶었다.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가슴속에 있었고, 잘해왔다는 경험이 받쳐줬고, 하루에 같은 거리를 가는 시간의 1초를 단축한다는 목표가 있었고, 같은 꿈을 좇는 자전거 동호인들이 있었다.
나는 이 자전거 구입 현상이 대한민국 청년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 마음이란 것은 욕구라도 불러도 되고, 욕심이라 불러도 되고, 성취욕이라 불러도 되는 어떤 것이다. 승부에 지기 싫어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다. 뭔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운동을 싫어하는 아이도 줄다리기에서 자기 반이 질 것 같으면 눈물을 흘려가며 뒤로 눕는다. 나무에 달린 사과를 어떻게든 따서 먹으려고 발버둥 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조상은 나무 아래서 입을 벌리고 있다가 굶어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본능이 그러하듯 승부욕과 성취욕도 성장 과정에서 어느 정도 사라진다. 욕구 자체가 사라졌다기보다 살다 보면 필연적으로 승부에 지는 일도 생기고 성취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일도 생기는데 그걸 여러 번 겪으면서 ‘체념’하는 것에 가깝다.
‘아, 이번에도 분명 이기지(이루지) 못할 거야.’
현재 청년의 주축인 85년생에서 95년생은 한국의 사교육이 과열되면서 극심한 경쟁을 하며 자라났고, 그 와중에 IMF로 인해 갖고 있던 것을 뺏기다시피 집안이 갑자기 어려워지는 것을 겪었다. 가난과 정신적 충격을 견디고 대학교에 합격하고 졸업까지 했더니 이제는 일자리가 없다고 한다. 노력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주어진 적이 없다.
이건 사람을 앉혀다 놓고 매시간마다 두들겨 패는 것과 같다. 이젠 안 그러겠지 하면 한 대 더 맞고, 이젠 끝났겠지 하면 한 대 더 맞는 생활.
성범죄자에게 화학적 거세를 실시해 성욕을 제거한다고 하는데 불쌍한 청년은 사회적 거세를 당해 다른 것과 더불어 승부욕·성취욕을 잃어버렸다. 승부와 성취에 대한 욕구 자체를 상실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며 실은 그것이 ‘포기하는 한국 청년’의 근본 원인이다. 그들을 그로기 상태로 만든 기성세대는 더 이상 두들겨 맞지 않을 거라는 걸 보장해 주어야 한다. ‘왜 취직 안 하나’, ‘왜 결혼 안 하나’, ‘왜 자식 안 낳나’를 묻기 전에 청년이 그럴 환경인지, 기성세대인 자신이 뺨을 얼마나 후려쳤는지 먼저 생각하고 반성해야 나라에 발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