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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송 Jan 28. 2019

한국 사람들은 굉장히 빨리 걷는다

고산지대에 살아서 생긴 습관

한국에 돌아온 지 며칠째, 시차 적응을 위해 낮에 안 자려고 하지만 따뜻한 방에 앉아서 버티기가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점심을 먹고 나면 졸음을 쫓고 소화를 도울 겸 이리저리 동네를 걸어 다니곤 한다. 가끔은 시장까지 걸어가기도 한다. 2킬로미터 남짓한 거리다.

그런데 예전과 뭔가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거리는 별로 변한 게 없고, 날씨는 예전처럼 추웠다. 인도에 깔린 보도블록의 색마저 같았다. 달라진 건 다른 게 아니라 내가 걷는 속도였다. 다른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나를 추월해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많이 지나쳤으면 내가 통행에 방해가 되는 정도로 느리게 걷는 건 아닐까 고민을 하게 될 정도였다.

여전히 느릿하게, 그러나 인도의 가장자리 쪽을 걸으며 나는 걷는 속도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내가 느려진 걸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빨라진 걸까. 겨우 일 년 반 정도 외국에 사는 사이 한국 사람들의 걸음이 유독 빨라졌을 리는 없었다. 내가 느려진 것이었다.

다음으로 나는 원인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다. 왜 나는 느려졌을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이 라파스(La paz)에서의 생활이었다. 나는 남미 여행을 하던 도중, 볼리비아의 라파스라는 도시에서 3개월 가까이 살았다. 그곳은 '세계 최고'의 타이틀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그건 바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시라는 타이틀이다.

라파스의 평균 해발고도는 3,600미터가 넘는다. 사람이 모여 사는 동네 중 가장 높은 곳은 무려 4,000미터를 넘기도 한다. 한국에는 2,000미터가 넘는 산조차 없는데 안데스 산맥 위에 자리 잡고 사는 사람들은 고산병이 나타나는 높이에서 생활, 그러니까 뛰고 자고 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고산지대에서 가장 크게 바뀌는 환경은 뭐니 뭐니 해도 기압과 산소다. 높은 곳에선 기압이 낮아지고 그에 따라 한 번에 들이켤 수 있는 산소의 양이 줄어든다. 쉽게 예를 들자면 항상 한쪽 콧구멍을 막고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한쪽 콧구멍을 막고 오래 달리기를 하면 과연 얼마나 할 수 있을까? 사실 달리기는커녕 오르막길을 걷기만 해도 숨이 차 중간에 쉬어야만 한다.

처음 라파스에 살기 시작했을 때는 고산지대에서 사는 것에 대한 적응이 안 되어 있었다. 일단 집에서 나오면 한국에서 그랬듯 목적지를 향해 힘차고 빠르게 걸었고, 그러다 숨이 차고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면 그제야 '아참! 여기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시였지.' 하며 걸음을 늦추었다. 한 달쯤 지나고 나니 내가 숨을 쉬기 편안한 속도로 걸음을 걷게 되었고, 어떤 활동을 하든 숨이 차지 않을 정도로만 하게 되었다. 그 결과 걸음이 남들보다 훨씬 느려지게 된 것이다.

걸음이 느려져서 사람들이 나를 자주 추월해 가기는 하지만 사실 불편해진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백수 신세고, 약속이 있으면 집에서 조금 일찍 나가기만 하면 된다. 오히려 천천히 걷기에 힘이 들지 않고, 주변을 좀 더 자세히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겨서 좋다.

외국에 나가 있는 내내 외국인과 한국인을 번갈아 만나며 알게 된 것이지만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다들 걸음이 빠르다. 목적의식이 강하고, 시간을 어기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평소 5분 가던 거리라면 10분에 걸쳐서 걷는 것도 나쁘지 않다. 늘 바쁘게 걷다 보면 자기 생활의 리듬과 생각마저 빨라지게 마련이다. 조금은 천천히 걸어보는 게 어떠할까. 우리 사회 전체가 여유로움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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