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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송 Dec 17. 2015

독립을 위해 주름진 손에 폭탄을 쥐다

은예린, <강우규 평전> 독후감

강우규는 일제강점기 때 3대 총독으로 부임해온 재등실에게 폭탄을 던진 한의사이자 교육자요 독립운동가였다. 폭탄을 날릴 당시 이미 65세였다고 하는데 그는 어떻게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런 결심을 하였을까?

舊서울역사 앞 강우규 의사 동상

일제강점기, 민족의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많은 독립운동단체가 생겨났는데 노인동맹단도  그중 하나였다. 강우규는 1919년 3·1 운동의 직후인 4월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김치보 등이 결성한 노인동맹단에 가입했고 이들은 수 차례에 걸쳐 국내에 잠입해 독립 만세를 외치거나 폭탄 반입 및 요인 척살을 시도한다. 평균수명이 지금보다 한참 낮던 시절에 고령의 노인들이 폭탄을 들고 저항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정신력이 얼마나 강인했는지를 보여준다.


강우규의 독립운동은 일회성 폭탄 투척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라나는 미래의 교육에도 관심이 많아 이동휘와 함께 홍원에 영명학교를 설립했으며 학생들에게 조선을 식민 지배한 일본 침략의 부당함을 폭로하고 그들의 야만적인 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독립운동에 그가 일찍이 한의사로서 모은 재산을 모두 던졌음은 물론이다.


참으로 어두운 시대였다. 지금 해방된지 70년이 되어 말로만 전해지고 그 시대를 직접 겪은 어른들은 80세 노인이 되었지만 후세인 우리가 일본의 잔혹함과 그에 맞서 싸운 조상들의 노고를 잊어서야 되겠는가. 하지만 단지 강우규 의사가 재등실 총독에게 폭탄을 날렸다는 단편적인 사실만을 기억하지 말고, 그 당시의 정세와 역대 총독들이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행한 정책이 어땠는지 그리고 항일운동가에 대한 처벌은 또 어땠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작가 은예린은 이러한 점을 놓치지 않고 책에 잘 기술하였으며, 당시 강우규의 의거를 보도한 신문기사까지 빠짐없이 실어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를 더했다.


강우규의 의거는 재등실의 척살만 놓고 보면 실패했다. 재등실 총독은 단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이 훼손되었을 뿐이고 주변에 있던 삼십여 명의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뿐만 아니라 강우규 본인도 악덕 친일 경찰 김태석의 손에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형무소에서 죽어야 했다.

그러나 이 노인은 죽음을 앞두고서도 오직 나라와 청년들을 걱정하며 이러한 말을 남겼다.

내가 죽어 조선 청년들의 가슴에 이상한 느낌을 줄 것 같으면 그 느낌이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다.

이것이 3·1 운동 이후 최초의 개인 의열투쟁을 일으켰고, 그것을 통해 윤봉길과 이봉창 의사에게 열정을 불어넣었던 강우규 의사의 생각이었다.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하고 흐르는 대로 흘러오다 엉망진창이 된 현대사를 맞은 우리들이 친일을 옛 일 치부하지 말고 다시금 되새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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