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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송 Sep 01. 2019

[스포주의] 버닝을 보고 나서

이창동 <버닝> 감상평

 버닝은 내게 불편한 영화였다. 내가 느끼기 싫어하는 감정을, 여러 차례 마음의 문을 시끄럽게 두들기며 끌어내고 말았다.

 첫째는 부유하게 자란 이들에 대한 열등감이다.

 혜미가 벤의 친구들 앞에서 신나게 아프리카 여행에 대해 이야기한다. 리틀헝거의 춤, 자이언트헝거의 춤. 울먹이는 혜미의 목소리와 대조적으로 벤의 친구들은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다. 무표정보다도 더 보기 싫은, 옅은 조소가 떠 있다.

 물적인 것들을 다 갖춘 이들에게 어떠한 물질도 갖지 못한 이가 '배고픔 이상의 무엇'을 이야기 하는 것이 어떻게 보일까. 나는 그들의 마음이 옅은 조소를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나는 제 이야기에 심취한 혜미의 춤을 더 이상 보지 못하고 빨리감기를 눌러야 했다.

 둘째는 등단하지 못한 소설가가 느끼는 자괴감이다.

 소먹이를 주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던 종수는 혜미를 만날 때까지는 저 혼자 불만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혜미의 방벽에 햇볕이 드는 시간만큼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혜미와 벤이 함께 나타났을 때부터 종수는 자괴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젊은 나이에 비싼 차와 좋은 집을 가진 미남. 객관적인 조건에서 종수가 나은 면은 단 하나도 없다.

 하지만 종수는 혜미에게는 특별한 존재였다. 혜미 스스로 종수를 '하나 뿐인 친구'라고 벤에게 소개했으므로. 그러나 그 특별한 우정은 벤의 등장 이후로는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건 단지 빈 말이었던 걸까?

 무너져가는 행복한 시간들 속에 급기야 종수는 모든 일이 꿈이었던 것은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우물은 그에 대한 상징이다. 우물이 없었다는 혜미가족과 이장의 증언으로 인해 종수가 미쳤거나 꿈을 꾸었다는 심증이 굳어져 갈 때쯤 갑자기 나타난 종수의 엄마가 상황을 반전시킨다. 우물은 있었고, 혜미는 사실을 말했다. 이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양이 역시 존재했으리라는 확신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종수는 보일이를 잡을 수 있었고, 벤을 죽일 결심을 하게 된다.

 벤의 집을 떠날 때 이제 혜미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한 건 그런 의미다. 이미 결론이 나서, 벤을 죽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버닝의 종수와 벤은, <기생충>의 기택과 박 사장의 관계와 같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가 모든 걸 다 가진 자를 살해한다. 그것은 치밀한 계획에 바탕한 것이 아니며 오직 뜨거운 감정에만 기인해 있다.

 그런데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한 바는 무엇이었을까?

 남에게 굽힐 줄 몰라 징역까지 살게 되는 종수아빠, 수십년간 연락이 없다가 돈이 필요하다며 나타난 종수엄마가 반드시 등장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궁금하지만 핵심 메시지 파악을 위해 영화 포스터를 참고해 본다.

<버닝> 포스터

 포스터에는 혜미, 종수, 그리고 벤이 서 있다. 나는 이 세 중심인물 모두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가진 게 없지만 물질의 소유 이상을 좇는 혜미, 소설가가 되려 하지만 글을 쓰지 못하는 종수, 물질의 풍요 위에서 일상의 단조로움을 깨뜨리고자 발버둥치는 벤. 이것들이 모두 나의 모습이다.

 아마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인물, 혹은 다른 부분이 기억에 남으리라 생각된다. 하나의 고정된 메시지를 주려고 한 것은 아니라는 게 내 결론이다.

 148분이나 되면서, 그리고 내 기저의 감정을 건드리면서도 뚜렷한 메시지가 없는 듯한 이 영화를 보고서 나는 이창동 감독이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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