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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송 Oct 10. 2019

우리는 뇌 그 자체일까요, 그 이상의 무엇일까요?

마르쿠스 가브리엘, <나는 뇌가 아니다> 독후감

 현대의 우리들은 과학이 발전해 하늘을 나는 비행기, 지구 반대편과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인터넷, 손바닥만 한 기계로 사진 찍기와 전화를 동시에 할 수 있는 휴대폰을 개발해내는 것을 보며 모든 것을 과학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빠져 있다. 

 이러한 생각은 인체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서,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위는 뇌에서 비롯하며 따라서 인간은 뇌 그 자체라는 생각이 무척이나 만연해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생각은 '신경 중심주의'이며 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것을 반박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간의 사유, 의식, <나>, 심지어 우리의 정신 그 자체가 위치한 장소를 알아내고 그것들을 공간과 시간 안에서 관찰 가능한 사물과 동일시할 수 있다고 믿었다. 뇌 혹은 중추신경계와 동일시할 수 있다고 말이다. 나는 이 생각을 간단히 신경 중심주의로 명명하고 이 책에서 반박하려 한다. - 본문 중

 그런데 사람들은 왜 우리들이 뇌 그 자체인지 아니면 그 이상, 혹은 그와는 다른 무엇임을 알고자 하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우리가 하는 행동을 왜 하는지 스스로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때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흡연을 보자. 흡연자들은 왜 담배를 피울까? 몸에 좋지 않은 줄 몰라서? 돈이 남아도니까 매일 조금씩 쓰고 싶어서? 아마 대다수는 "피지 않으면 심심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 알면서도 분명한 이유 없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에 가까운 것이다. 그나마 설명할 만한 이유가 "중독이 되어서."인데 오직 뇌에서 니코틴 중독에 걸렸으니 담배를 피우고 싶어 한다는 것이 흡연이라는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뇌에서 비롯한다는 신경 중심주의와 일치한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 행위의 진짜 동기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 이는 우리 모두가 익숙하게 느끼는 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행위 설명, 곧 누군가가 특정 행위를 왜 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설명을 추구한다. - 본문 중

 어쩌면 이 책을 집어 든 독자들은 우리의 행위와 의식이 단지 뇌에서 발생하는 전기신호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이기를 바라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러한 결론을 기대하며 이 책을 펼쳤듯이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과학자가 아니며 과학적으로 신경 중심주의를 반박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어디까지나 철학적 견지에서 우리 의식의 <나>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해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우리 뇌가 무의식적으로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우리 뇌와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단 앞뒤가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와 우리 뇌가 동일하다면, 뇌는 어떤 다른 시스템의 무의식적 결정에 종속되지 않으니까 우리는 자유로울 테니까 말이다. 나의 뇌가 나를 조종하는데, 나는 다름 아니라 나의 뇌라면, 나의 뇌, 곧 나는 자기 자신을 조종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가 손상되기는커녕 해명된다. 즉, <나>와 뇌를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비록 의식적으로 숙고된 결정의 차원에서는 아니더라도 어딘가에서 자유를 받아들이는 셈이다. - 본문 중

 위에 인용한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나>와 뇌가 왜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하는지 저자의 생각을 알 수 있다. 만약 우리와 우리 뇌가 동일하다면 우리 뇌는 내외의 어떤 간섭도 받지 않으므로 뇌는 독립적이다. '우리=우리 뇌'이므로 우리 또한 독립적이게 되며, 우리는 오직 우리 뇌의 조종만 받는 아주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우리 인생에 내리는 모든 결정,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오직 우리만이 조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우리 뇌가 우리와 정말 동일한 것인지를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철학적으로는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과 예시에도 불구하고 아마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뇌 그 자체인지 그 이상의 무엇인지 1+1=2라는 사실처럼 명확하게 알 수는 없으니 말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과정이 오직 운명에 의한 것인지, 우연에 의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기계적 반응(생리적 반응)에 의한 것인지를 묻는다. 이러한 질문은 만약 우리가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 못하고 운명에 의한 필연에만 의지해 살아가는 존재라면 <나>라는 것에 대해 묻는 의미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도 여러 철학자의 주장을 들려주는데, 아예 신이 내려준 운명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한 사람도 있고 모든 것이 자유의지에 대해 결정된다고 한 사람도 있지만 내게 와 닿은 것은 그 중간 격인 양립 가능론이었다.

한 입장은 이른바 양립 가능론이다. 양립 가능론이란, 자유와 결정론이 실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한편으로 모든 사건 각각에 대해서 필요충분조건들이 존재하며 그것들은 한참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은 서로 조화를 이룰(양립할) 수 있다. - 본문 중

 우리의 인생이란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된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우리 자유의지로만 정해지는 것도 아니지 않을까? 아무리 계획대로 철저히 사는 사람일지언정 지금 이 순간 눈을 감을지 뜰지, 오늘 저녁에 갈비찜을 먹을지 콩국수를 먹을지 모든 것을 다 정해놓고 사는 사람도 없고 그리 마음먹는다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고 모든 게 신이 정해준 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하자니 인생에 시련이 많았던 사람들은 왜 자신에게만 그런 시련이 주어지냐며 대단히 억울해 할 수 있으므로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이렇게 답을 내기가 어려우니 저마다 주장을 펼친 중세와 현대 철학자들의 의견이 아직도 생생히 살아있는 것이다.

 이 책에선 쉽고 뚜렷한 결론을 끝까지 내주지 않았지만 내 나름의 결론을 짓기 위해 하나의 예시를 들어보겠다. 나는 2014년 12월 31일을 기점으로 담배를 끊었다. 담배를 끊은 것은 전적으로 내 의지였음을 설명할 수 있는데, 그 첫 번째 이유는 담배 가격이 오르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자전거를 타는데 폐활량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나의 신경생물학적 기질(혹은 뇌의 생존본능)이 개입했을 수 있다. 계속해서 유입되는 니코틴과 타르에 고통받은 폐가 뇌에 "더 이상 흡연하지 못하도록 해!"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뇌가 그에 따라 담배 맛이 예전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조정했을 수도 있다. 또한 이러한 '의지'와 '생물학적 기질'의 밖에서 신이 정해준 '운명'이 개입했을 수도 있다. 사인이 폐암이 아닌 다른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방해물을 제거하고자 흡연이란 선택지를 지우는 신의 힘이. 하지만 이러한 나의 금연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신경생물학자 혹은 철학자가 있을까?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나>의 정의에 대한 토론을 지속될 것이라는 게 내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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