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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송 Nov 03. 2019

답답할 땐 옥상으로!

제한된 공간을 벗어나 위안을 얻는 법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사는 곳의 높이가 바로 지위를 뜻한다고. 생각해보면 평범한 사람들은 30층이 넘는 아파트에 살 일이 잘 없다(나만 그런가?). 고백하자면 우리 집은 단 한 번도 10층 위에 있었던 적이 없고, 나는 자취를 시작한 이래 4층 위로 올라가 본 적이 없다. 반면 부자들은 30층이니 50층이니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에 산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말은 제법 잘 맞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높은 곳에 오르길 좋아한다. 설악산도 올라본 적 없으면서 히말라야로 떠난 것도 부자라고 해서 마음대로 발 디딜 수 없는 높은 산꼭대기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산에 오를 때의 끔찍한 고통을 싫어하면서도 우뚝 솟아오른 산만 보면 가슴이 설레 미칠 것 같다. 그곳에 올라서 보는 풍경이 어떤지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잦은 등산은 육체적 고통을 초래할 뿐, 높은 곳에 올라가 탁 트인 경치를 보고픈 내 맘을 달래주는 일상의 공간은 따로 있다. 바로 우리 원룸의 옥상이다.

 겨우 3층짜리 건물의 옥상이지만 그곳에 오르면 갑자기 다른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탁 트인 하늘은 천장이라 부르기엔 끝이 없고, 넓은 옥상은 정확히 우리 건물의 한 층에 있는 4개 방과 복도를 합친 것만큼 넓다. 집에서 사색을 하자면 앞으로 2보, 뒤로 2보를 반복해야 하지만 옥상에선 뒷짐을 지고 이리저리 걸어 다닐 수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들은 일상에서 심각하게 공간을 제한받고 있다. 평일에 동선은 집과 직장 사이로 제한되고, 직장 안에선 내 자리와 화장실 사이로 제한된다(나의 경우엔 하루 종일 원장실과 치료실 사이). 사람은 환경에 무척 많은 영향을 받는 동물, 아니 거의 전적이다시피 환경에 '지배당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좁은 공간에서 반복적으로 활동할 경우 굉장히 무기력해진다. 어릴 때부터 병 속에 벼룩을 가두고 못 뛰게 하면 나중에는 병에서 꺼내 주어도 못 뛴다는 우화를 들어왔으면서도 정작 우리들이 그 병 안의 벼룩이 되어가는 줄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 객관화라는 게 그렇게 어렵다.

 그러나 그런 현실을 여태 눈치채지 못했다고 해서 스스로를 비난하지 말자. 우리들은 스스로를 제3의 눈으로 보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며, 눈앞의 각종 자극과 스트레스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살아가는 지구 상의 한 마리 평범한 동물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중요한 것은 나를 좁은 공간 밖으로 끄집어내 기분 전환을 시켜주는 일이다.

 옥상으로 올라가 보라. 아, 원룸의 옥상문을 열어두는 것이 혹시나 자살방지를 위한 어떤 규칙(혹은 법)에 위배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혹시 자살방지를 위해 옥상문을 잠그는 게 법으로 강제되어 있다면 참으로 배를 움켜잡고 진심으로 비웃어주고 싶다. 죽고 싶은 사람에게 옥상이냐 바로 그 아래층의 복도 창문이냐는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의지가 있는 인간에게 그런 사소한 것이 문제가 될 쏘냐. 오히려 옥상문을 활짝 열어두어 새파란 하늘 아래 크게 숨 쉴 자유를 주는 것이 우울증 완화와 자살 방지에는 백 번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오늘도 옥상에 잠시 올라갔다. 별로 하는 것은 없다. 내가 늘 지나다니는, 지금도 많은 동네 주민들이 걸어 다니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고 차를 타고 지나가는 거리를 내려다보며 평소와 확 달라진 풍경을 음미할 뿐. 좁은 방 안에 앉아서 컴퓨터를 볼 때 호시탐탐 모공을 파고 들어가 뇌수를 적실 기회를 엿보는 우울감은 옥상에선 살아남을 수 없다. 모두에게, 잠깐의 옥상 산책을 권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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