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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송 Jan 29. 2020

모든 독재자가 비참한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는 이유

영화 <남산의 부장들> 감상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수작이었다. 영화 자체를 아주 잘 만들었다기보다 배우들의 연기가 좋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였다. 특히나 이병헌은 역시 믿고 보는 이병헌이었다. 모든 긴장이 최고로 고조된 상황에서 김재규(이병헌 역)가 박정희(이성민 역)를 겨누었을 때 나는 총구를 마주한 박정희의 주마등을 상상했다. 그는 최후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영화가 보여주는 박정희의 말로는 필연적이다. 박정희는 내려올 때가 되었고, 그 내려오는 방법은 하야가 아니고선 죽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하야를 거부했고, 옥죄어 들어오는 미국의 압박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하고자 했으며, 그러기 위해 이인자들을 자꾸만 버렸다. 하지만 이인자를 자꾸 쳐내다 보면 반드시 이인자에게 배반을 당하게 된다. 이인자 역시 살고자 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이인자가 사는 방법은 퇴사가 아니다. 일인자를 처단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일인자가 살고자 하는 짓이 결국 일인자 스스로를 죽게 만드는 짓이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전혀 아이러니하지 않다. 모든 독재자의 최후는 비참할 수밖에 없다. 권력의 쟁취 과정에 대해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권력은 아주 막강하다. 인류사를 통틀어 권력자들은 일반인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아주 당연한 것처럼 저질러왔다. 백 명의 후궁을 둔다든지(이제는 날조된 것으로 알려진 의자왕의 이야기는 아니다. 세계사에는 이러한 독재자가 아주 많다), 백성들은 굶주려 죽어가는데 비행기로 캐비어를 공수해 먹는다든지, 유명한 가수를 개인적인 일로 오라 가라 불러서 공연을 본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그런 권력은 절대 자연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달리 말해, 강한 권력을 얻는 과정에는 반드시 피가 흐른다. '무혈입성'이란 사자성어가 존재하는 이유를 되짚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성을 얻기 위해선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하기에 피를 흘리지 않는 입성이 아주 특별한 케이스로 회자되는 것이다. 권력자들은 한 번 권좌에 앉고 나면 그 피가 그저 과정에 불과했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모든 피는 언젠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박정희는 쿠데타 과정뿐만 아니라 18년의 장기집권 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 자기에게 반대한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를 따르던 사람들, 한때 그의 사냥개였던 이들까지 죽였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내가 100명을 죽여 권좌에 올랐다고 생각해 보자. 100명에게 3명씩 가족이 있다면 300명의 원수가 생긴다. 내가 권좌에 있는 동안 300명의 경호원을 고용해 이들을 억압하고 막을 수 있겠지만, 권력을 내려놓는 순간 나는 들판에 알몸으로 선 한 마리 양에 불과하다. 그동안 이를 갈던 사람들에게 맞아 죽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억지로 권좌에 앉은 사람은 자기 권위에 집착하게 되고, 주변 사람을 믿지 못한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밤마다 브루투스의 칼에 찔리는 카이사르가 생각날 것이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설령 그간 충성을 바친 이인자라 할지라도 제거하게 되고, 결국 곁에는 상황 파악도 못하는 아첨꾼들만 남게 된다. 그때는 끝이 가까운 것이다.

 박정희는 독재자였지만 모자란 사람은 아니었다. 상황 판단에 능하고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역시 그의 말로가 가까움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장점인 결단력은 살리지 못했다. 권좌에서 추락한다는 공포 때문에 하야라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택하지 못한 것이다. 계속해서 이인자를 제거하다 스스로가 이인자에게 제거당한 그의 사인(死因)은 역사적으로는 '필연'이랄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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