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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송 Aug 01. 2020

트루먼 증후군

 영화 <트루먼쇼>를 다시 봤다. 나는 늘 다시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영화를 틀기 시작하면 어떤 전개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첫 부분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고 어딘가 결정적인 한 장면이 떠오르고 그다음에 연결되는 부분들이 드문드문 기억나는 식이다. 그래서 늘 새롭게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게 이 나쁜 기억력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트루먼쇼>에서 기억이 났던 건 단연 마지막 장면이었다. 모든 비밀을 알게 된 뒤 무대를 떠나는 남자의 활기찬 인사와 가벼운 발걸음과 사라지는 뒷모습. 영화 속 시청자들도 환호했지만 이 영화를 본 모든 관객이 이 장면에서 감동하지 않았을까?

 재밌는 건 내가 TV 속에 나오는 사람이 아닌데도 트루먼의 심리가 희한할 정도로 공감이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 내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심지어는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 과해지면 일종의 망상증이 될 수 있는 이러한 감각이 어째서 내게도 존재하는 것일까?

 아마 <트루먼쇼>가 개봉되기 이전의 현대인들은 이러한 생각을 덜했을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고 나서 사람들은 '나 역시 누군가의 광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됐을 수 있고 원래 가벼운 망상증이 있던 사람의 경우에는 그게 심화되어 일명 트루먼 증후군이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감시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국정원의 불법 도청 사건과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사건이 있다. 분단국가라는 이름하에 정부 반대세력을 대놓고 감시하고 탄압했던 박정희 시절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박정희 시절에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은 그래서 정부를 불신하게 되었고 언제든지 권력이 내 사생활을 들춰볼 수 있다는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잘 있던 옆집 학생 철수가 자고 일어나면 남산에 끌려가 있고 그랬으니 아직도 베이비붐 세대가 자식들 데모 나가는 것을 꺼려하고 혼내는 이유를 알 만하다.

 영화 속의 트루먼은 한 여자의 용기로 인해 자신이 비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첫 단서를 잡았고 그 여자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음으로 인해 결국 항해에 나서고 무대를 벗어나게 된다. 사실 내가 트루먼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일까? 내가 트루먼이라면 사람들은 내게 트루먼임을 말해주지 않을 것이고, 내가 트루먼이 아니라면 그런 상상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트루먼이 모험을 떠나고자 했던 자신의 동기를 잊지 않았던 것처럼 하고 싶은 일을 향해 쭉 나아가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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