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단편소설
2012년 12월 31일. 말일의 자정이 조금 넘어 S는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원래 생일이나 기념일 따위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S지만,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은 S의 시든 창작욕에도 조금은 특별하게 다가왔다. 눕기 전에 99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고 나서 ‘아, 역시 난 안 되겠어!’라고 생각했지만 자의식 과잉의 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생애 첫 소설 쓰기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처음 단순하게 무엇을 쓸까 하는 고민에서 어느 새 말일이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 무엇을 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넘어가면서 S의 정신은 시간이 갈수록 또렷해지고 있었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한참 고민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올 해 가장 자신을 괴롭게 했던 일을 주제 삼아 짧은 소설을 쓰기로 했다. 바로 정치였다. 말일에 쓰는 소설이란 일 년을 돌아보고 정리하여 서랍 속에 넣기 위한 작업이고, 너무 번잡해서 가장 정리하고 싶은 것이 정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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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어떻게 소설로 승화할 것인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만물에 씨앗과 뿌리가 있는 것처럼 S는 결국 자신이 처음 정치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을 때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리저리 흘러가는 어구의 물고기 떼 속에서 S가 캐치한 것은 ‘소년’과 ‘청년’의 구별이었다.
S의 소년기는 평범했다. 남들처럼. 어릴 때 미술학원을 다니며 전국초등학생미술대회에서 입선을 했고, 피아노학원을 다니며 체르니 30번까지 배웠고, 태권도도장을 다니며 2품자격증을 땄다. 소년 S는 남들처럼 공부했고, 남들처럼 대학에 갔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것은 그 자신이 생각해왔던 것처럼 아주 의미 있고 성숙해 지는 계기를 통해서였다.
2008년 2월, 소년 S는 등록금 마련을 위해 혼자서 농협 대출창구를 찾았고 은행 문을 열고나서면서 청년 S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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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대출이란 게 그리 어렵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집에 돌아온 S는 그 날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한 달 수입 200-300’ ‘한 학기 등록금 500’ ‘한 학기 기숙사비 150’ ‘한 달 생활비 30’ 머릿속에 숫자들이 핑핑 지나갔다. 남들처럼 살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남들도 몇 백만 원씩 대출해 가며 대학을 다니는지 의문스러웠다. 부모님은 지금 당장 낼 형편이 안 되어서 그렇지 나중에 차차 갚아준다 하셨지만, S는 생활비를 부모님께 받으니 자기 공부할 돈은 스스로 마련하고 싶었다.
S는 입학 후 과외를 시작했고 돈을 버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시간당 2만 원 정도를 받으면서 나름 만족스러운 생활을 했지만 여러 가지 생각이 함께였다. 과외비는 10년 전부터 그대로라는데 왜지? 나는 나름 편하게 돈을 벌지만 시간당 4천원 받으면서 일하는 건 정말 고되겠는데… 하는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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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외로 버는 돈은 쉽게 모이지 않았다. 일단 지금 받는 생활비부터 스스로 해결하려다보니 과외비는 생활비로 모두 나가게 되고, 결국 S는 2학기에도 대출을 받아야 했다. 대출 총액이 천만 원이 되면서, S는 현실감을 잃어버렸다. 기껏해야 자신의 힘으로 벌어본 돈은 2백만 원가량. 한 번도 벌어보지도 써 보지도 못한 돈이 대학등록금이라는 명목으로 동그라미를 일곱 개나 달고 있었다.
그 뒤로는 꿈의 연속이었다. S는 과외를 점점 늘려갔지만 점점 늘어나는 수입은 지출의 증가로 이어졌고, 여자 친구를 만나고 동아리 활동을 하고 후배들을 만나면서 한바탕 꿈을 즐겼다. 대출 총액의 숫자는 모니터 속의 기호에 불과했지만, 지갑 속의 지폐는 현실이고 꿈을 유지해 주는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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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S도 지금 정권의 공약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반값 등록금 실현. 당시 S는 투표권이 없었지만 설마 대통령 선거에서 거짓 공약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었다. 대학에 입학한 후, 등록금이 내리 긴커녕 대출제도만 정비되었다. 불만은 있었지만 힘이 없다고 생각했고, 옛날이야기처럼 휴학과 등록금 마련을 위한 노동과 복학을 반복하지 않는 게 어디냐며 기꺼이 대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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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 총액이 3천5백만 원이 되었을 때, S는 거리로 뛰쳐나갔다. 냉혹한 현실의 무게 앞에 꿈은 깨졌다. 춥고 힘들지만 현실이 S가 있어야 할 곳이었다. 꿈은 달콤했지만 그 맛은 가장된 것이었다. 데이트를 하고 술을 마시고 영화를 보고 옷을 산다고 해서, 대출액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고 대통령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현실의 잔인함을 꽁무니에 달아 눈에 띄지 않게 했을 뿐이었다.
거리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 날을 위해 몇 백일을 거리에서 홀로 싸워온 사람도 있고 S처럼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기 시작하면서 동참한 사람도 있었다. 오랜 시간 앞서 싸워온 사람들에게 미안하게 느껴졌다. 내 숙제를 남한테 맡겼다가 찾아온 기분이었다. 각자가 토해내는 불꽃의 크기와 모양은 다양했지만 본질이 불길이라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대통령과 여당은 약속을 이행하라! 심리적 반값이 웬 말이냐!’
S는 아무 것도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라 배웠고, 그대로 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너무 앞에 나서지 말라며 걱정했고, 거리에 나설 때면 촛불을 들고 물대포를 맞아야 했다.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집에 돌아오는 버스를 탈 때마다 S는 점점 화가 났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이 나라의 속담이 모두 거짓말이었는지, 아니면 힘 있는 자는 사회의 규칙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 어느 쪽이든 간에 더럽다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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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대학생 한 명이 사망했다. 등록금 마련을 위해 제대 직후 아르바이트를 해 왔는데, 냉동기 점검․보수 작업을 하다 유독가스를 마셔 동료 3명과 함께 사망한 것이다. 그는 식당과 공장 일을 하며 월 100만원을 버는 어머니, 고등학생인 여동생 등 세 가족으로 서울 성동구 옥수동의 보증금 1500만원, 월세 20만 원짜리 반지하 단칸방에서 함께 살아왔다고 했다.
이날 조선일보는 1면에 <반값 등록금 희한한 역설>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는데, 이 기사에서는 반값 등록금이 현실화하면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LG전자, 포스코, SK텔레콤 등 국내 매출 상위 5대 기업이 학자금 지원 비용이 연간 1000억 원 가량 줄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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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는 그 해, 등록금뿐 아니라 다른 문제들 때문에도 거리로 나섰다. 등록금의 문제가 단지 등록금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등록금은 내역도 없이 비싸고, 가난한 학생들은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정부는 그 와중에 장학금을 타라했다. 아버지는 열심히 일하지만 많은 돈을 벌 수 없었고, 누군가는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절반도 안 되는 급여를 받아야 했다. 정부가 말하는 일자리 창출은 단순작업 일용직노동자가 대다수였고,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은 대기업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아 아찔할 지경이었다. 자기가 나서서 해결될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이 너무 가혹하고 냉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죽었다. 그리 먼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의 내 가족이 아닐 뿐, 나중에 내 친척이고 가족의 일이 아니란 법은 없었다. S는 그저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함께 노래하며 밤을 지새우는 것에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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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위협이 닥치면 이를 드러내고 싸우는 맹견 타입과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도마뱀 타입. 일견 맹견은 용감하고 멋지면서 도마뱀은 비겁해 보이지만 실상 목숨을 구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점에서 둘은 같다. 그리고 마냥 일관된 것 같지만, 사실 맹견도 사자를 만나면 도망가고 도마뱀도 파리를 만나면 잡아먹는다.
대출 총액이 4천5백만 원이 되면서 S는 꿈과 현실의 경계선에 섰다. 마냥 거리로 나서는 것은 현실의 무정함을 간과하는 일이었고, 마냥 책만 보는 것은 현실 그 자체를 저버리는 일이었다. 둘 다 현실인 동시에 현실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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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2월 19일은 S가 태어나서 처음 하는 대통령 선거일이었다. 신분증과 투표용지를 확인받고 투표소에 들어서 도장을 집어 들었다. 처음이라 그런지 호흡이 가빠지고 손이 덜덜 떨려왔다. 죽음을 눈앞에 둔 양 지난 5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BBK 설립한 적 없다
7%의 경제성장을 통해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달성하고 7대 강국으로 도약한다
반값등록금 시행위원회
주어가 없다
지면이 모자라 생략
본인은 반값등록금 약속한 적 없어
심리적 부담을 반으로 하겠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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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투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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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이 끝난 이틀 뒤, 한진중공업의 한 노조간부가 사측에서 제기한 손배소를 비관하며 목숨을 끊었다. 일주일 사이 노동자와 시민활동가 등 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진중공업의 노조간부는 정리해고 되었다가 복직한 후 다시 무기한 휴업상태로 내몰려 있었고 유서에는 “… 또 5년을…”이라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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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일의 햇살은 눈이 부시게도 밝았다. 며칠 동안 비와 눈이 번갈아 오며 추위를 더하더니 간만에 아침부터 휘황찬란하게 세상이 빛나고 있었다. 눈곱도 떼기 전에 S는 컴퓨터부터 켰다. 항상 일어나면 휴대폰에 연락 온 게 있는지 보고 그 다음 컴퓨터를 켜서 메일과 뉴스를 보는 게 그의 일상이었다.
숙취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한 어제오늘의 뉴스를 주르륵 훑어냈다. 뉴스를 보고 있으면 그 전까지의 행적이 머릿속에서 합쳐졌다. 선거 후 절망감에 죽은 노동자의 빈소와 5·18 묘지를 방문한 前대통령 후보의 행보가 기사로 나와 있었다.
아침을 먹고 S는 타이핑을 시작했다.
타닥타닥…
모니터에 떠오르는 것은 오직 ‘사람 사람 사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