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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송 Oct 13. 2020

길게 보면 우리는 늘 과정 속에 있을 뿐

 <미생> 14권을 읽었다. <미생>은 여기서 완결인 것일까? 프리퀄이 실려 있으니 마지막인 것 같지만 마지막이 아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책을 덮고서 나는 왜 <미생>을 좋아할까 생각해 보았다. 일단은 <미생>을 통해 회사생활을 간접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회사를 다녀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다닐 확률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회사를 다니며 삶을 일군다. 말하자면 <미생>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조금 엿보는 기분이랄까?

 기본적으로 <미생>이 성장물인 것도 나의 마음을 잡아끄는 한 요인이다. 오직 바둑만 둘 줄 알았던 장그래가 기본적인 성실한 태도만으로 대기업 인턴으로 고군분투하는데, 그 속에서 자기만의 시각으로 해법을 찾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 성장해 나가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뭉클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공중보건의로 첫 근무를 시작했던 2014년 4월의 나는,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한의사였다-그렇다고 지금 뭘 더 많이 아는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작가는 未生은 美生이라고 하며 작품을 마쳤지만 나는 이 말을 잠시 곱씹어보았다. 완성되지 않은 삶은 아름다운 것인가? 아직도 바둑 두던 시절 집에 쌓인 빚을 갚지 못한 장그래의 삶은 아름다운가? 물론 빚이 있다고 해서 아름답지 못한 삶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고, 未生이어도 美生일 수 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죽기 전까지는 모두의 삶은 未生이다.

 은퇴해서 20년째 소일거리만 하고 사는 할아버지도, 이제 내일모레 딸을 결혼시키는 아주머니도, 얼마 전 공무원 시험에 떨어진 공시생도 삶을 완성하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지금 시험에 떨어지고 붙고, 돈을 얼마를 받거나 빌려주고, 집을 사거나 파는 행위 모두 과정에 불과하다. 죽는 그날까지 삶은 비자발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또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몰라서 사실 내가 몇 살까지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해도 그걸 달성할 여건이나 될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은 삶의 고약한 면 중 하나다.

 그러니 삶을 길-게 보자. 길-게 살란 보장은 없지만 그렇다고 짧게 살 거라는 보장도 없다. 그렇다면 길-게 보고 호흡을 길-게 가져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100살 여정이라면 이제 1/3을 채워가는 지점에서, 未生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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