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송 Dec 04. 2020

인생과 운명은 다르고, 삶과 세월도 그렇다

옌렌커, <나와 아버지> 독후감

 얼마 전 옌렌커의 <연원일>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서 가졌던 의문이 있습니다.

 '이 작가는 어째서 이토록 노동에 관해서 잘 알고 있을까?'

 <연월일>에는 특히 농사짓는 가족의 구체적인 모습이 많이 드러납니다. 씨를 뿌리는 법, 물을 주는 법, 가물었을 때 물을 끌어오는 법, 열매가 익었는지 판단하는 법 등. 처음에는 농부에게 인터뷰를 해서 쓴 게 아닐까 했는데 사실 농사에 관해서만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연월일>에 실린 단편 중 하나인 <천궁도>에는 불가마에서 일하는 죄수의 삶도 너무나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답은 이번에 읽은 책은 <나와 아버지>에 있었습니다. 바로 옌렌커가 농민의 아들로, 시골의 노동자로서 처절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아버지에 대한 일종의 회고록입니다. 60세가 되기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작가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아버지의 몸이 안 좋기는 했지만 자기가 효도를 다 하지 못해 더 일찍 돌아가신 건 아닌지, 그리고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서 잠시나마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입니다.

 그러나 이 책 전부가 작가의 죄책감을 드러내고 해소하는 수단은 아닙니다. 그보다 문학적 가치의 면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중국의 아버지 세대, 옌렌커 작가가 58년생이니 아버지는 38년생쯤 되겠죠. 38년생이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 막판에 태어난 세대이고 89년생인 저의 할아버지 세대와 겹칩니다. 우연히도 저희 아버지께서 59년생이니 옌렌커와 동갑이고, 옌렌커의 아버지 세대는 저와 같은 80년대생의 할아버지 세대라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정말 먹을 것 입을 것도 없어 굶어 죽는 사람과 얼어 죽는 사람이 넘쳐났던 30년대생의 삶에 대한 사실적 기록이자 그들의 영혼 앞에 바치는 위로의 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글을 통해 드러나는 (옌렌커의) 아버지 세대의 삶은 처절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옥에 살아도 그보단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먹을 게 없어 나무껍질을 벗겨 먹으며 버티다 결국 대부분은 굶어 죽어 버리고, 겨울이면 집안에 들여놓은 물독이 얼어서 터져버립니다. 이 와중에 아버지들은 자식들 먹이겠다며 자기는 죽조차 제대로 먹지 않고, 얼음이 언 강에 들어가 자갈을 수레 단위로 주워 집을 짓습니다. 집을 짓는 것도 자식들을 결혼시키기 위해선 (신랑 앞으로) 집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기록자인 옌렌커 역시 이 시대의 생존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아버지께 선물해 드리고 싶어졌습니다. 동년배가 작성한 어릴 적 이야기가 아버지께 당신만 힘든 삶을 견디며 살아온 것은 아니라는 작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옌렌커는 중국 사람이지만 글에서 어떠한 위화감도 느끼지 못할 만큼 중국의 60-70년대 모습은 우리와 비슷했습니다.


  인생과 운명에 대한 작가의 지론도 인상 깊게 남았습니다.

 인생은 가늠하고 예측할 수 있는 깊음이지만 운명은 계량이 불가능한 심연이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고 노력하며 만들어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운명은 갑자기 닥쳐오는 사고나 죽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착하게 열심히 살면 성공하고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착하게 열심히 살아도 갑자기 차에 치여 죽거나 암에 걸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전적으로 운에 의한 완벽한 우연, 그것이 '운명'이며 그래서 운명은 전혀 예측하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작가의 운명관은 책에 나오는 사촌동생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의해서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한 명은 군대에 갔다가 상관에게 구타를 당해 자살했고, 한 명은 길에 서 있다가 음주운전 트럭에 치여 유명을 달리했으니까요. 큰아버지가 손등이 얼어 터져 피가 줄줄 흐르도록 겨울에도 힘들게 노동해 먹여 살린 아이들이 그렇게 쉽게 가버렸으니 이것을 인과응보라고 해야 할까요 인과관계는 쥐뿔도 없는 운명이라고 보아야 할까요?

 삶과 세월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 역시 좋습니다.

 도시 사람들은 '세월'을 '삶'이라고 부르고 시골 사람들은 '삶'을 '세월'이라고 부른다.

 삶이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처럼 보이고 세월은 절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처럼 보이죠. 세월은 가만히 있어도 지나가는 것이고 삶은 우리가 몸을 움직여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죠. 도시와 시골 사람들의 견해는 그렇게 다르다는 것을 이 뛰어난 작가는 한 문장으로 짚어냅니다.


 <나와 아버지>를 읽고 나면 중국이 우리나라와 정말 닮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 중국 사람들 이야기인데 꼭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 이야기만 같습니다. 제 할아버지는 농촌에서 태어나 농민으로 평생을 살다 돌아가셨고, 제 아버지는 농촌에서 태어났지만 도시로 떠나왔습니다. 옌렌커가 문화 대혁명을 겪었다면 우리들의 아버지는 전후의 황폐한 대한민국에 태어나 커서는 IMF를 겪었죠. 옌렌커의 아버지 세대는 어떻게든 자식들 결혼시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게 지상 최대의 과제였고, 우리들의 할아버지 역시 결혼하고 대를 잇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셨죠. 

 또 그 아수라장에서 자랐기에 옌렌커가 지금의 재밌고 뛰어난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옌렌커도 작가로 성공하기 이전에는 어릴 때부터 일한 농부의 아들이었고, 시멘트 공장에서 열여섯 시간씩 일을 하며 집에 돈을 부쳐주기도 했고, 도시로 가고 싶다는 욕망에 군인이 되기까지 했으니까 얼마나 다채로운 삶이었나요. 결국 <연월일>에서 그토록 농민과 노동자의 삶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비결은 그것이었습니다. 작가 본인의 체험. 우리나라의 50년대생 중에서도 이런 뼈에 사무치는 소설을 쓰는 작가가 나중에는 나오지 않을까요? 작은 기대를 품어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생애 가장 재밌게 읽은 중단편 소설 3편이 한 권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