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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송 Nov 27. 2020

내 생애 가장 재밌게 읽은 중단편 소설 3편이 한 권에

옌렌커, <연월일> 독후감

 오랜만에 너무나 재밌게 읽은 소설책입니다. 특히 중편이나 단편소설의 경우, 매년 청년문학상이나 이효석문학상 수상작들을 읽지만 솔직히 아주 재밌게 읽었던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작가의 소설은 완전히 제 취향을 저격하네요. 한 편씩 줄거리를 소개하고 감상을 덧붙일까 합니다. 유명한 책이 아니기에 스포 논란은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혹시나 스포가 싫으신 분은 뒤로 가기를 누르시면 됩니다.


1. 연월일

 농사꾼판 <노인과 바다>입니다. 심한 가뭄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는 가운데 한 노인과 장님 개만이 마을에 남습니다. 이 노인은 옥수수 한 그루를 키우기 위해 정말 눈물 나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매일 물 뜨러 먼 길을 다니고 자기와 개 소변을 비료 삼아 주기도 하죠. 먹을 건 없고 옥수수가 자라나는 데 시간이 걸리니 그동안 노인은 생전 안 하던 빈집털이까지 합니다. 빈집에 먹을 것이 없자 쥐들이 몰려가는 곳을 찾아 거기서 쥐들이 훔친 양곡을 빼앗아 오기도 합니다.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노인은 결국 옥수수를 키워내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정작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한 탓에 자기가 그 옥수수를 먹을 순 없었죠. 

 우리가 인생에서 남기고자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한 그루 옥수수를 키워내는 것일까요? 나의 옥수수는 무엇일까요? 무언가에 처절하게 매달리는 인간에게서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 소설이었습니다.


2. 골수

 한 남녀가 결혼을 합니다. 자식을 낳습니다. 그런데 셋째까지 줄줄이 딸에 간질발작이 있습니다. 마침내 넷째를 낳아 아들을 얻지만 그 역시도 바보입니다. 간질이 유전이라 자식 백 명을 낳아도 모두 간질병을 앓을 거란 의사의 말에 남편은 자살해버립니다. 홀로 남은 아내는 아픈 자식 넷을 데리고 살아야만 합니다.

 너무 막막해서 누구라도 남편 따라 죽고 싶은 생각이 들 상황이지만 주인공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악착같이 자식들을 키워냅니다. 마을 사람들과 싸우고 사돈댁을 속여가면서 첫째와 둘째 딸을 시집도 보냅니다. 셋째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서 자기 집에 남아있던 모든 곡식을 남김없이 줘버립니다. 그런데 둘째 딸의 병을 치료하는 도중에 남편의 뼈가 간질병에 효과가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 비극적인 비밀을 깨달을 아내는 자살하면서 넷째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 결국 부부의 죽음을 통해 네 자식은 간질로부터 벗어나 정상인의 삶을 살게 됩니다. 정말 쌀 한 톨,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식을 위해 쏟아버린 셈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뭐든 해줄 의무가 있을까요? 정말로 요즘 종종 언급되는 '낳음 당했다'가 부모 자식 관계의 민낯일까요? 부모 자식 간의 원치 않았지만 맺어진 관계, 그리고 책임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 소설이었습니다.


3. 천궁도

 이번엔 절름발이 남자 이야깁니다. 너무나 결혼을 하고 싶었던 그는 2천 위안을 주겠다 약속하고 예비 신부와 관계를 맺습니다. 하지만 봉투 속에는 돈 한 푼 들어있지 않았죠. 어쨌든 순결을 바친 여자는 절름발이에게 시집을 오고 절름발이는 약속한 2천 위안을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 와중에 열불 터지는 일이 크게 두 번 발생합니다.

 첫 번째 사건은 촌장의 사기입니다. 촌장이 바람을 피우다 절름발이에게 발각당하자 차라리 돈을 줄 테니 정기적으로 와서 망을 봐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몇 달 후 절름발이가 경찰에 붙잡혀 갑니다. 촌장네 공장에서 정기적으로 물건이 없어졌으니 절름발이의 소행이라고 주장합니다. 구류를 살다 나와보니 촌장은 자기가 절름발이를 구하기 위해 애썼노라며 절름발이의 아내에게 대가로 매춘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도 10회나.

 두 번째 사건은 촌장 다음가는 부자인 장씨네 큰아들의 사기입니다. 장씨네 큰아들이 도둑질을 해 형을 살게 생겼는데 절름발이에게 돈을 줄 테니 형을 살아달라고 합니다. 한 달 정도 예상하고 700위안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재판을 하고 보니 2년형이 떨어졌습니다. 절름발이는 한 달 옥살이하려다 졸지에 2년간 갇히게 됩니다.

 저 같으면 아마 첫 번째 사건이 벌어졌을 때 아내와 관계를 맺는 촌장의 목덜미에 낫을 박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일은 일대로 시키고, 돈을 줬다가 다 뺏어가고, 아내까지 뺏으려 들다니. 이걸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물론 절름발이는 참았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개고생 한 절름발이는 죽음의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앞의 두 사건은 절름발이가 이승에서의 삶을 회상하며 나오는 것들이죠. 이제 저승으로 완전히 넘어갈까 하는 판국에 절름발이는 이승에서 우리 남편을 제발 살려달라고 비는 아내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처음 데려올 때 그토록 예뻤던 아내는 어느새 많이 퇴락했습니다. 절름발이는 결국 아내 곁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사람은 왜 결혼을 하는 걸까요? 절름발이처럼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성관계도 하지 못하고 매일 구박받으면서도 결혼생활을 유지하려 드는 이유는 뭘까요? 대체 결혼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살아야 할까, 소설 <스토너>가 잠시 떠오르기도 하는 소설이었습니다.


 지구촌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농부, 시골, 가난, 사랑, 부부, 장애, 죽음에 대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밌고 실감 나게 쓴 점도 좋지만 옌렌커의 문장력 또한 대단히 뛰어납니다. 몇 문장만 옮겨보겠습니다.

 그녀는 또 한쪽으로 기울인 둘째 딸의 얼굴에서 촉촉하고 붉은빛이 나는 것을 발견했다. 비 온 뒤의 불붙은 듯한 감나무 단풍 같았다.
 얼굴은 몹시 가문 날의 못자리처럼 바짝 말라 있었다. 누런 잎처럼 꺼칠꺼칠한 것이 물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바람 속에 나부끼는 실처럼 노곤하게 들려오던 이날 할아버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떠신가요? 재밌게 보셨나요?

 옌렌커의 소재 선정이나 주제의식, 문장력이 마음에 드셨다면 한 번 <연월일>을 직접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줄거리를 요약해서 써드렸지만 직접 그 문장 하나하나를 읽는 것과는 분명 다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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