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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송 Dec 18. 2020

1950년대, 중국 공산당의 인민 학살기

옌렌커, <사서> 독후감

● 중국의 토법고로 운동이 끼친 영향
 중국은 중진 국가로의 도약을 위해 중공업 분야를 성장시키기로 결정 → 목표 생산량을 잡고 지구에 하달 → 지구에선 목표치를 채우기 위해 처음에는 철광석을 사용하다가 부족해지자 멀쩡한 농기구를 집어넣기 시작 → 생산량은 늘어났으나 사용할 수 없는 쓰레기철 생산 → 농기구 부족으로 농사 효율이 떨어짐 → 식량 부족 → 설상가상으로 제련을 위해 불을 때느라 산의 나무를 다 베어버림 → 가뭄과 홍수 발생 → 대기근 발생 → 3천만 명 이상의 아사자 발생

 <연월일>, <레닌의 키스>에 이어 세 번째 읽은 옌렌커 작가의 소설입니다. <사서>는 장편소설로, 1950년대 중국에서 대약진운동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던 토법고로 운동의 실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역사를 돌아보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금의 위치에 올랐나 신기할 때가 있습니다. 중국은 광활한 영토와 그 어떤 나라보다도 많은 인구를 가졌고, 일본처럼 핵폭탄을 맞거나 우리처럼 비참한 내전을 겪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0년대에는 늘 우리에게 무시당하는 국가였죠. 제대로 만드는 물건 하나 없는 나라, 인구만 많았지 뭐 하나 뛰어난 게 없는 나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 비밀은 바로 대약진 운동에 있었습니다. 커다란 도약을 이루겠다며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실행한 것이 오히려 중국의 발전을 가로막은 것이죠.

 가장 앞에 제시한 네모상자 안에 든 내용이 바로 토법고로 운동의 영향을 요약한 것입니다. 철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어떻게 해야 질 좋은 철이 만들어지고 그걸 수출해 돈을 벌 수 있을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공산당 우두머리가 "한 달에 철 100만 톤을 생산하도록 해라!" 한 마디 하고 아래에서는 비판적 사고 없이 무조건적으로 따르기만 하다 보니 본말전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원래는 질 좋은 철을 많이 만들어 중진 국가가 되려고 했는데 도리어 그 과정에서 멀쩡한 물건까지 쓰레기로 만드는 바람에 수치상으로는 분명 철을 많이 만들었는데 질적으로는 인민의 노동력+국가의 목재+다른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까지 합쳐 쓰레기를 만든 꼴이 되었죠. 내부적인 비판 없는 결정체계가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사서>는 특히 99구 위신구(특정한 구역, 소규모 집단농장쯤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 토법고로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이 99구의 인민들은 원래 거기 살던 사람들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자본주의의 노예 등으로 찍혀 잡혀온 죄수들입니다. 그런데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지식인들입니다. 성모 마리아를 믿었다는 이유로 잡혀온 종교인, 부르주아적 음악을 연주한다는 이유로 잡혀온 음악인, 대학에서 연구를 하다 잡혀온 학자, 그리고 의사 등입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돈이 있거나, 배웠거나, 돈 있는 집의 자식이거나, 서양 문물에 가까이 있었던 사람은 모두 죄인으로 간주되었던 것이죠. 그러니 대대로 가난하게 살아온 농민 말고는 죄인 아닌 이가 얼마나 있었을까요? 우리들도 때로는 가진 돈과 권력으로 횡포를 부리는 사람들을 보고 분노하며 "죽창을 들자"라고 말하지만 단지 돈이 많고 서양 문물을 접했다는 이유로 죽창을 맞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요?

 토법고로 운동이 진행되며 99구의 지식인들은 나날이 무너져갑니다. 착한 일을 했을 때 주는 작은 종이꽃 125송이를 모으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주겠다는 아이(지도자)의 말에 처음에는 황당무계한 명령을 거부했던 지식인들도 하나 둘 복종하게 됩니다. 지고지순한 줄 알았던 음악은 98구의 상급자에게 몸을 팔아 자신의 연인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고, 죽는 한이 있어도 성모마리아의 초상을 밟을 수 없다던 종교는 굶주림 끝에 콩 몇 알만 얻을 수 있다면 마리아의 눈알을 파내겠다며 초상을 짓밟고 찢어버립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군들 그러하지 않을까요. 먹을 것이 없어 가죽 허리띠를 끓여 그 끓인 물만을 마시며 연명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하나 둘 굶어 죽어가고, 아이가 주는 종이꽃도 힘을 잃어감으로써 토법고로 운동은 끝이 날까요? 인민들은 행복을 찾을 수 있었을까요? 

 저 넓디넓은 대륙의 크고 작은 모든 마을에서 99구와 같은 아사의 재난이 일어났다는 걸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파옵니다. 결국은 중국 정부도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인정했고 나중에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지만 이미 죽어버린 3천만 명과 그 가족들의 상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코로나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힘든 요즘 시기지만 그래도 국가가 아직은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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