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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송 Jan 05. 2021

원장님한테 침 맞은 날은 진통제 안 먹고 자요

 특별히 무슨 일이 있어서 쓰는 일기는 아니다.

 단지 오늘 환자분께 들은 말은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어서 쓰는 일기다.


 원장님한테 침 맞은 날은 진통제 안 먹고 자요.


 하루 평균 45명 정도의 환자를 본다.

 입원환자가 35명, 외래로 오는 환자가 10명 정도다.


 이 중에는 내 마니아들이 있다.

 예전에도 꼭 나에게 침을 맞아야겠다며 다른 원장님의 회진시간을 피해 다니는 사람이 있었고, 지금 입원환자 중에도 나한테만 맞으면 안 되냐고 묻는 분이 몇 분 계신다. 오늘 오신 외래 환자 중에도 2명이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객관적으로 침을 잘 놓는가 묻는다면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다른 모든 한의사들의 침치료 장면을 본 것도 아니거니와 침치료의 우열을 가리는 객관적 기준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어떻게 놓아야 가장 효과가 좋을지 늘 고민하고 있고, 한 가지 방법을 통해 호전이 보이지 않으면 침놓는 부위를 바꾸든 혈자리를 바꾸든 깊이를 바꾸든 여러 가지 다른 시도를 해 보는 편이다. 그러다 보면 잘 낫지 않던 환자도 효과를 보는 날이 온다. 

 물론 끝까지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럴 때 나는 정신적 위안을 주려고 노력한다. 나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혼자서 갖기 힘들다. 하지만 환자들은 의사의 말에 많이 의존한다. 무조건 100% 완치된다는 희망을 주는 건 좋지 않지만 지금보다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심어주는 것은 중요한 치료법이라고 생각한다. 의사가 평생 이 병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솔직하게 던진 말에, 인생이 끝나는 것 같았다고 하는 환자도 있으니 말이다.


 사실 진통제를 달고 사는 환자가 내게 침을 맞은 날 진통제를 안 먹고 잔다는 말은 기분이 좋으면서도 솔직히 신기하기도 하다. 내가 회진을 돌면서 침을 놓는 시간은 1-2분 남짓. 그때 놓는 30-40개의 침만으로 강력한 진통제의 효과를 대체할 수 있다니. 그것도 먹지 않고 잔다는 것은 오후에 침을 2시에 놓으니 다음날 오전 9시까지인 19시간 동안 효과가 나타난다는 말이 아닌가.

 침의 진통효과가 내인성 오피오이드 분비 등으로 인해 나타난다는 것이야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 진통효과가 어디까지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죽을 것 같은 통증이 10, 아무런 통증이 없는 상태가 0,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해야만 하는 통증이 8이라면 대체로 7 이하의 통증을 다루는 데 효과가 우수하다는 점에는 모두 공감하지 않을까.


 기분 좋은 밤이고, 그 이면에 책임이 느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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