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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송 Dec 19. 2020

문어의 지능과 내 인생의 관계

넷플릭스, <나의 문어 선생님>을 보고 나서

 나는 오늘 점심에 골뱅이 통조림을 먹었다. 아침에는 치킨텐더를 먹었다. 어제저녁에는 계란말이를 먹었다. 어제 점심에는 고등어구이를 먹었고, 어제 아침에는 진미채를 먹었다. 바다에서 온 골뱅이와 고등어와 오징어, 그리고 양계장에서 온 닭과 계란. 나는 그것들을 먹으며 아주 작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채식이야말로 우리와 지구를 구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늘 주장하는 선배가, 나에겐 있기 때문이다.

 채식이 우리를 구하는 길이라는 선배의 주장을 접하고서 나도 공부를 해 보았다. 단지 선배가 그런 말을 해서가 아니라 자꾸만 계절에 맞지 않게 급변하는 날씨,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우리의 코를 틀어막은 미세먼지, 또 별안간 생겨난 전염병 등을 보며 지구가 아프다는 걸, 그리고 우리가 그 안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걸 스스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389번 귀 인식표를 단 암소』,『육식의 딜레마』를 읽고 공장식 축산의 잔인함에 대해 알게 되었다. 물론 그전부터 이야기는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하나하나 그 광경을 묘사한 문장을 읽고 있으니 여태 내 입으로 들어간 고기가 그런 잔혹한 과정을 거쳤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런 잔혹한 처사를 견뎌야 했던 동물들에게 미안함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채식을 하고 있지는 않다. 단지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먹는 일이 많이 줄었다. 다른 사람이 원해서 간 식당에서는 먹지만 내가 먼저 소 돼지를 먹으러 가자고 하지는 않는다. 엄격한 채식주의자가 보기에는 하염없이 부족한 일이겠지만 나는 작게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실천하는 중이다.

 하지만 모든 생명을 존중해야 마땅하다는 관점에서 볼 때 내가 하고 있는 행위는 너무나 미약하다. 여전히 다른 생명(동물)을 섭취해 배를 채우고 즐거움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마 많은 사람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채식이 지구에 좋고 동물에게 좋다는 걸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다. 내 생각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물(특히 우리가 자주 먹는 소, 돼지, 닭 같은 동물)이 사람만큼 똑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별다른 죄책감 없이 육식을 하는 것이다. 개나 고양이를 먹지 않는 걸 봐도 명백하다. 늘 곁에 두고 살아보니 신문을 물어오고 이불을 덮어줄 줄 아는 개, 자기 대소변 가리고 맛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할 줄 아는 고양이가 우리만큼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먹지 못하는 것이다.

 『1389번 귀 인식표를 단 암소』의 저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아마 많은 사람이 경매장에서 동물이 거래되는 모습을 보고 나면 육식을 하지 못하게 될 거라고. 어미를 두고 끌려 나가는 송아지의 울음소리와 눈빛을 접하고서 예전처럼 소고기를 입에 넣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의 문어 선생님』은 우리가 지능이 낮을 거라고, 그러니까 잡아먹어도 괜찮을 거라고 쉽게 생각해 온 한 생물을 다시 보게 만드는 다큐멘터리다.

 남아프리카의 다큐멘터리 감독 크레이그 포스터는 휴양을 위해 남아프리카의 한 해변에 머물게 된다. 그곳에서 매일 잠수를 즐기던 중 한 문어를 만나게 되는데 매일같이 잠수를 하다가 문어가 자신을 알아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매일 문어를 찾아가 관찰하고, 처음에 감독을 경계하던 문어는 점차 마음을 열게 된다.

 영상 속에서 문어가 감독을 알아보고 친해지는 과정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이뤄지는 과정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처음에는 눈으로만 인사하고, 나중에는 작은 접촉을 시도하고, 친해지고 난 다음에는 상대를 믿고 자신을 오롯이 맡긴다.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상처를 입고 잠시 멀어지는 과정이 있어도 결국 꾸준한 화해의 시도를 받아주는 것도 사람과 완전히 같다. 친구가 된 다음 문어가 감독의 손가락에 자기 다리를 얹는 모습에서 나는 거대한 전율을 느꼈다.

 문어의 지능은 사람에게 전혀 처지지 않는구나!

 나중에 문어에 대해 검색해 보고 나서 나는 정말 놀라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 무척추동물을 통틀어 크기 대비 뇌 용량이 가장 크다.

 - 미각(빨판을 통한 감각), 촉각, 시각을 종합하여 개개인의 사람을 구별할 줄 안다.

 - 먹이를 숨겨놓고 손가락으로 위치를 가리키면 그 의미를 알아채고 먹이를 찾으러 간다.

 이 정도만 놓고 봐도 문어가 얼마나 지능이 높은지 알 수 있다. 우리가 먹지 않으려고 애쓰는 개나 고양이만큼,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지능이 높을 수도 있다. 

 사실 우리는 문어(엄밀히 두족류가 어류는 아니지만)를 비롯한 어류가 지능이 낮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데 여러모로 실험을 해 보면 어류도 당연히 지능이 있는데 다만 그걸 인간의 척도로 판단하기가 어려울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능이 높은 동물을 먹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자면 먹을 수 있는 동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인간 역시 지구에 살아가는 수많은 동물 중 하나임을 감안할 때 우리가 다른 동물을 섭취하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문어가 작은 생선을 잡아먹고 살다가 자기보다 강한 상어에게는 잡아먹혀 죽는 것처럼, 우리도 약육강식의 법칙을 받아들이고 패자(覇者)의 지위를 누리며 살면 될까? 아니면 다른 생명을 존중하자는 의미에서 육식을 전면적으로 중단해야만 할까?

 나는 『나의 문어 선생님』 이후로는 문어는 먹지 않기로 했다. 굳이 문어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내 삶에 아무런 지장도 없기 때문이다. 개, 고양이를 먹지 않는 것도 내게는 취향의 문제다. 굳이 먹을 필요는 없으니 먹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동물을 배제할 수 있을까? 그리고 꼭 그래야만 하는가? 그것은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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