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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송 Feb 25. 2021

작고하신 김XX 원장님을 기억하며

 원장님을 생각하니 배가 먼저 떠오른다.

 마흔다섯 살 정도 차이나는 우리에겐 늘 그 나이만큼 적당한 거리가 있었다. 아버지보다는 멀고 할아버지보다는 가까운. 가끔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몇 번 안 되는 시간에 원장님이 한 번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

 원장님은 천안 근교의 한 과수원집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51년생의 또래가 으레 그러하듯 아래로는 몇 명의 동생들도 있었던 듯하다. 어쨌든 과수원을 둔 집은 부유했고 원장님은 초등학교(당시에는 소학교였을지도 모르겠다)를 채 졸업하기도 전에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초등학생인 원장님이 살아갈 방법은 식모 고용뿐이었고, 그렇게 친척이 구해준 집에서 식모를 데리고 어린 나이에 독립을 했던 것 같다. 공부를 잘해 곧 명문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원장님이 말해주신 중학교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원장님 집은 사대문 밖이고 중학교는 사대문 안에 있었다고 한다. 당시 명문중학교는 모두 사대문 안에 있어서 사대문 바깥사람이 명문중학교 교복을 입고 버스에 타면 다들 신기하게 쳐다보았다고 한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나중에 유명해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중 재벌 2세의 형인지 동생인지도 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SK가인지 한화가인지 그것 역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교 졸업 후에는 한양대 의대에 입학했다. 한 번은 과대표를 맡았었는데(예과 2학년 때였을 것이다) 당시에는 교수들이 과대표를 맡는 학생들을 괴롭히는 문화가 있어서 과대표가 된 후 술자리에서 만난 교수님이 "김XX, 너는 이번 학기에 유급 각오해!"라고 외치셨다고 한다.

 졸업 후 모교의 병원에서 정형외과 수련을 받고 싶었지만 TO는 정해져 있고 정형외과 수련의가 되기 위해선 빽싸움이 치열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그러다 친척의 아는 사람인가를 통해 다른 대학병원의 정형외과에 지원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국정원 소속으로 빽이 대단해서 전공의가 되기 위한 면접(혹은 시험)을 치를 때 원장님께 직접 연락해 문제를 미리 다 알려주었다. 치열한 경쟁 끝에 정형외과 수련을 하게 된 원장님은 나중에는 구미의 순천향대 병원으로 파견을 가게 되는데, 당시(1970년대 후반으로 짐작) 구미의 공단에서 워낙 신체 절단 사고가 잦아 일손이 부족해 원장님이 하루 종일 수술을 해도 다 해내지 못했을 정도였다.

 정형외과 전문의가 된 이후 원장님은 군의관으로 복무하게 되는데 이때 무척 즐거우셨던 모양이다. 같이 점심을 먹다가 군의관 시절이 참 좋았다는 이야기를 하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원장님은 수백 번의 선을 보고 나서 한 여자와 결혼을 했다. 수백 명을 만나본 후 아내를 택한 이유는, 구미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서울에서 주말마다 도시락을 싸서 오는 정성에 반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꼭 한 마디를 덧붙이곤 하셨다.

 "유 원장은 결혼 잘 못 해서 나처럼 인생 망치면 안 돼!"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던 그 말은, 원장님의 아내와 자녀들이 모두 미국에 가서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뒤로 뼈아프게 다가왔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이제 세상에 남은 것은 내 가족밖에 없을 때 그 사랑을 베풀고 받을 대상이 모두 이역만리에 있다면 얼마나 쓸쓸할까.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 이미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원장님이 홀로 보낸 세월이 거의 30년쯤 될 것이다. 세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겨우 10년 남짓 키우고서 모두 떠나보낸 원장님. 그 마음이 얼마나 쓸쓸하고 괴로웠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던 원장님은 어느 날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일하나 싶어 잘하고 있던 병원의 문을 닫았다. 그 후 자유롭게 불러주는 곳마다 가서 일을 했고 그러다 우리 병원에서 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처음 뵈었을 때 연세에 비해 너무 정정하셔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51년생이신데 89년생인 나와 키가 비슷해 보였으니 아마 젊을 때는 더 크셨을 것이다. 51년생에 180cm가 넘는 키라니 또래 사이에서 군계일학이었음이 틀림없다. 키만 크신 게 아니라 어깨도 넓고 손목도 굵으셔서 몰래 원장님을 관찰하던 나는 속으로 옛날 정형외과 의사들은 요즘 같은 기계가 많이 없었으니 저렇게 체격이 좋은 사람을 뽑았겠구나 생각했었다.

 아침이면 오뚜기 수프를 먹고, 버스를 타고 병원에 출근해 컴퓨터로 해외축구를 즐겨보며, 점심이면 꼭 신문을 들고 식당에 내려와 식사를 하시고는 조리사님들과 농담 한두 마디를 주고받고, 퇴근 후에는 바둑과 마작 아니면 술 한 잔 하기를 즐기던 원장님.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면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주변 사람을 위해주는 마음이 있었던 김XX 원장님.

 원장님은 여름부터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고 살이 빠지기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대상포진과 그 후유증인 줄 알고 치료를 했지만 좀처럼 효과를 보지 못했고, 가을에는 지인을 통해 분당 서울대병원에 가시더니 경추 추간판 탈출증 진단을 받아 치료를 시작했다고 하셨다. 그런데 추간판 탈출증의 검사와 치료 도중 가슴에서 이상한 게 발견됐고 정밀검사 결과 겨울의 초입에 폐암 진단을 받게 되셨다. 폐암 진단이 내려질 무렵의 원장님은 이미 피골이 상접하고 음식을 거의 넘기지 못해 보는 사람마다 건강을 걱정할 정도였다. 갑자기 등이 굽고 살이 빠지고 얼굴에 피로가 확연해 참 뭐라 말씀을 드리지 못할 정도로 보기에 안쓰러웠다.

 폐암 진단을 받고서 원장님은 그날 당장 50년을 피워왔다는 담배를 끊으셨다. 그리고 기운 없는 목소리로 내게 한방에서는 폐암 치료를 어떻게 하는지 알아봐 달라고 하셨다. 나는 그날 폐암 치료에 관한 한의학 논문 전부를 요약해 원장님께 쥐어드렸지만 사실 기적의 한약이라는 게 없으니 원장님께 큰 위로는 드리지 못했던 것 같다.

 올해 1월 초, 원장님과 통화할 일이 있었다. 원장님은 017로 시작하는 번호를 여태 쓰고 계셨고, 휴대폰 역시 스마트폰이 아닌 2G 폰이었다. 여하튼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 용건을 이야기한 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음에 또 연락드릴게요 한 뒤 끊었다. 그게 마지막 통화였다. 나는 그 뒤로 원장님을 보지도 못했고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렇게 원장님은 내가 모르는 사이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다.

 전해 듣기로 원장님의 가족은 결국 한국으로 오지 않으신 것 같다. 아내분과 사이가 좋지 않은 줄이야 알고 있었지만 막연하게 자녀분들은 그래도 오시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래서 원장님이 폐암 진단을 받으셨을 때도 아내분은 몰라도 자녀분들께는 연락을 하시라고 말씀을 드렸었는데... 연락을 하셨는지 안 하셨는지도 알 수 없다.

 원장님은 인생의 마지막 두 달을 보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이미 가족이 떠난 지 오래였기에 예전부터 혼자만의 최후를 준비하고 계셨을까. 그러나 누구도 자기가 마주한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 없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분명 누군가 마지막 순간에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지 않으셨을까. 그 마지막의 간절한 외로움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물론 원장님은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의연하게 떠나셨을지도 모른다. 보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의연하게 가셨으리라 믿는 수밖에.

 참, 서두에 썼던 배 이야기는 원장님이 내게 딱 한 번 하셨던 건데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유 원장, 가을 해 질 녘에 배가 다 익은 과수원을 내려다보면 말이야, 금빛이 번쩍번쩍하는 게 정말 눈부시게 아름답단 말이야. 본 적 없지?

 

 열심히 살았던 한 사람의 인생이 소리 없이 저물고, 세상은 변함없이 돌아가고, 나 역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죽음을 향해 매일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김XX 원장님에 대한 기억을 정리하고, 마지막 인사를 다시 한번 전하지 못한 송구한 마음을 내려놓기 위해 이렇게 글을 썼다. 언젠가 금색으로 빛나는 배 과수원을 보게 되면 또다시 백발의 원장님을 상기하리라. 

 저 세상에선 좋아하시는 과수원 보며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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