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초년생에게도 꽃말이 있다면, 아마 '실수'일 것이다. 생각해보라. '멋있는 사회초년생.', '능력 좋은 사회초년생' 어딘가 안 맞는 어순을 배열한 것 같지 않은가?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사람인지와 별개로 사회초년생이라는 직함을 얻는 순간 미숙하고 야무지지 못한 인상이 든다.
나는 이제 2년 차가 된 사회 초년생이다. 지금이야 업무가 능숙해졌지만 처음 입사를 했을 땐 셀 수 없이 많은 실수를 했다. 한 번은 오전 10시에 올라가야 할 도서 원고를 자정에 오픈한 적이 있다. 원고가 잘못 오픈되었다는 걸, 다음 날 출근을 해서 알았다. 심장이 지하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하필 팬층이 두터운 네임드 작가의 소설이어서 독자들에게 정신 좀 차리라는 욕을 잔뜩 얻어먹었다.
그 이후로도 실수는 계속됐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았지만, 또 다른 형태의 실수가 발생했다. 실수들의 끊임없는 변주였다. 내가 실수에 있어 창의적인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회차를 하나만 삭제해야 하는데 전체 회차를 판매 중지시켜버려서 대행사에게 읍소를 하며 장문의 사죄 메일을 쓰기도 했고, 회차를 뒤죽박죽 섞어서 업로드한 적도 있다. 다시 생각해도 눈물이 앞을 가리는 지난한 나날이다.
인턴 시절 처음으로 경위서를 썼을 땐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 배우는 거라는 위로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모니터를 보고 앉아 있었지만 머릿속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왜 그런 실수를 했지?’ ‘인수인계도 제대로 못 받았는데 이게 다 내 탓이라고?’ ‘이 회사 계속 다닐 수 있을까?’ 별에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침울해진 나를 지켜보다 못한 팀장님이 자신의 신입 시절 실수담을 여러 개 들려주었다. 다른 팀원 분도 질세라 실수담을 꺼내놓았다. 듣기만 해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실수였다. (내심 이렇게 생각했다. ‘나보다 심하잖아?’)
지금은 일을 척척 잘하시는 분들인데 사회초년생 때는 나처럼 파격적인 실수를 여럿 했다니.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는, 처음은 서투를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그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이후 신입 직원이 들어와 실수를 하면 "시행착오일 뿐이다."라고 위로해 주다가, 그마저도 먹히지 않으면 내가 저지른 실패담을 여럿 들려주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시행착오가 발생한다.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자꾸 실수를 연발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고, 자괴감이 들고, 부끄러우면서 화도 난다. 그 과정에서 실수를 하지 않는 방법을 많이 찾지는 못했다. 그저 숙련이 답인 듯하다. 다만, 실수를 자주 하는데도 면역이 생겨서 실수를 잘 수습하는 기술만큼은 몰라보게 성장했다.
확실한 건 자꾸만 쪼그라드는 나를 지탱해 주는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애인? 가족? 친구? 전부 아니다. 바로 '여러 개의 자아'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이를테면, 누군가의 딸, 독립해서 사는 나, 블로그를 하는 나, 글을 쓰는 나, 취미생활을 하는 나 등 한 사람에게는 다양한 정체성이 있다. 일을 하는 '사회초년생인 나'는 수많은 정체성 중 하나일 뿐이다. 많은 정체성 중 하나가 실패하고 고전한다고 해서, 나라는 존재 자체가 와르르 무너지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젠가 게임 같은 거다. 여러 개의 젠가를 쌓아두면 하나의 젠가를 뺀다고 해서 와르르 무너지는 일은 없지 않은가.
이런 생각은 개그우먼 박나래 씨의 강연을 통해 가지게 됐다. 박나래 씨는 ‘원더우먼 페스티벌’에서 이런 내용의 강연을 했다. ’ 개그우먼인 박나래가 있고 여자 박나래가 있고 디제잉을 하는 박나래가 있고 술 취한 박나래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저는 개그맨으로서 이 무대 위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까이는 거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듣고 감탄했다. 박나래 씨는 개그맨이라는 정체성에 충실하되, 직업인으로서의 모습을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때문에 무대 위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까이더라도 그걸 '박나래'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개그맨 외에도 여러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프로페셔널함이, 그 단단함이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다양한 정체성은 2020년의 핫 키워드이기도 하다. 서울대 트렌드분석센터는 2020년의 소비 트렌드 중 하나를 '멀티 페르소나', 즉 다중적 자아로 꼽았다. 지식백과에 따르면 멀티 페르소나는 ‘개인이 상황에 맞게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여 다양한 정체성을 표출하는 것'을 뜻한다. SNS, 직장, 동호회 등 상황에 따라 우리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사용하는 매체의 특성이나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친밀도에 따라서 말투와 행동이 변한다. 유튜브에서 10대에게 '10대에게 SNS란?'이라고 묻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10대 출연자는 'SNS는 또 다른 나'라고 대답했다. 그는 인터넷상의 나와 현실의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는데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멀티 페르소나는 직업적인 측면에서도 많이 인용되곤 한다. 생계를 위한 본업 외에도, 자아실현을 위해 또 다른 직업을 가지는 것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유튜브를 하거나, 취미 생활이던 춤으로 퇴근 후 강사생활을 하기도 한다. 본업이 아닌 부업을 통해 돈을 버는 일을 ‘사이드 프로젝트’라 한다. 사이드 프로젝트는 꼭 하나일 필요가 없다. 이제 투잡의 시대가 가고, 두 개 이상의 직업을 가지는 멀티 잡의 시대가 왔다.
멀티 페르소나, 멀티 잡의 공통분모는 하나의 자아에 모든 걸 투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나의 자아에만 힘을 실으면 그 자아가 실패했을 때 실존적 위기를 겪게 된다. 일에 너무 많은 비중을 실어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워라밸이란, 일찍 퇴근하여 저녁을 누리는 삶일 수도 있지만 ‘일하는 나’와 ‘일하지 않는 나’의 균형이 적절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일하는 나'가 실수투성이에 힘들어도 '일하지 않는 나'가 충분히 즐겁다면 견딜만한 삶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회사를 떼어 놓고도 스스로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왕이면 돈을 벌지 않더라도 좋아하는 일,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리지 않아도 되는 단어로 스스로를 정의해보자.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유시민 작가는 스스로를 글 쓰는 사람으로 정의 내린다. 나도 비슷하다. 나는 기록하는 사람이다. 글을 매일같이 쓰지 않을 때조차도 스스로를 기록하는 사람으로 여겨왔다. 그 사실은 입사를 하든, 퇴사를 하든, 날백수로 살아가든 변하지 않을 것이다.
평범하지만 작은 행복들을 누리는 일상을 적는 블로그 속 내 모습, 진솔한 글을 쓰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나, 찌개를 맛있게 잘 끓이고, 내 입에 딱 맞는 볶음요리를 할 줄 아는 살림꾼. 사회초년생인 내가 버틸 수 있는 건 나를 구성하는 수많은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그 덕에 나는 조금 서투르고 어설퍼도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