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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로 Sep 08. 2020

보라카이의 인어공주



  

때는 2018년 1월, 나는 보라카이에서 아주 진귀한 경험을 했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화이트비치에서 인어공주를 본 것이다! 파란색과 자주색이 섞인 비늘에, 우아한 꼬리 지느러미. 하반신은 물고기와 같고, 상반신은 인간인 그것은...다름 아닌 나였다.


웃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건 정말로 나였으니까. 나는 그날 화이트비치에 출몰한 한 마리의 인어였다. 우아하고 아름다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신기하고 황당한 몰골이었을거라는 건 분명하다. 인어공주 체험은 내 인생 가장 치욕스러운 경험 TOP 3에 든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해외여행을 처음 가는 나는, 여행에서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었고, 덤으로 인생사진도 얻고 싶었다. 그러던 중, 액티비티 예약 어플에서 ‘인어공주 체험’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흥미를 느꼈다. 바닷가에서 인어꼬리를 입고 사진을 찍는 체험인데, 얼핏 재미있어 보이는데다가 가격도 저렴하길래 덜컥 예약을 했다.(안 돼... 그만 둬...) 네이버 블로그에 체험 후기가 하나도 없는 게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대망의 인어공주체험 D-day. 한창 기분 좋은 여행을 즐기고 있던 여행 둘째 날 오후였다. 지도를 보고, 미팅 장소를 체크했는데... 어라...? 미팅 장소가 왜 화이트비치 한복판이지...? 여기서 차를 타고 다른 바닷가로 다같이 이동하려나? 땡땡땡, 불길함에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그 불안감은 곧 현실이 되었다. 미팅장소에 달랑 나 혼자 나타난 것이다. 다른 예약자들은 노쇼(No Show)를 한 모양이었다. 그때라도 상황을 알아차리고 튀었어야하는데. 나는 순진했고, 멍청했고, 그대로 뒤돌아서 나갈만큼 뻔뻔하지도 못했다.


체험 강사님은 보라카이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즐기는 키가 큰 서양인 여성이었다. 선생님은 먼저, 이 체험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체험 장소가 화이트비치라고 했다. 네? 화이트비치요? 그 탁 트이고, 관광객이고 현지인이고 드글드글하고, 다들 물놀이를 하고 있는 화이트비치요? 심장이 방광까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프라이빗한 수영장에서 사진을 찍는 건 좀 더 비싼 여행상품이 따로 있다고 했다. 내가 결제한 건 화이트비치에서 인어공주 체험을 하는 코스라고. 내가 착용할(?) 인어꼬리를 고를때는 반쯤 체념하고, 또 반은 처참한 기분이었다. 


아무튼 나는 꼬리를 들고 화이트비치로 출격했다. 꼬리는 수영복 같은 재질에, 꼬리 지느러미는 스티로폼으로 되어 있었다. 꽤 부피가 컸기 때문에, 꼬리를 고무보트처럼 어깨에 지고 이동해야했다. 그리고 화이트비치 한복판에서 인어꼬리를 착용하고야 말았다. 아아...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인어꼬리를 착용한 나는 당연하게도 모든 관광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중국인 단체여행객들이 우르르 몰려와 내 사진을 찍어가고, ‘머메이드, 머메이드.’ 하며 수군거렸다. 전방 100m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 그 꼬리를 입고 있으면 혼자서 설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어서 엉덩이로 기어다녀야 했다. 나의 수치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선생님이 ‘다른 포즈를 취해보라.’며 나를 채근하였다. 


처음에는 꼬리를 사선으로 비스듬하게 놓고 사진을 찍었는데,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꼬리를 하늘로 치켜드는 등 다양한 포즈를 취할 것을 종용하였다. 가뜩이나 남의 시선을 즐기지 않는 나는, 거기서 GG(항복, 포기 선언을 이르는 게임 용어)를 외치고 말았다. 내가 "부끄러우니, 그만하고 싶다."고 말하자 선생님은 나에게 "이 시선을 즐겨. 네가 이곳의 스타야."라고 말했다. 아뇨! 저는 스타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단호하게 체험 종료를 요구하자, 선생님은 내가 이 체험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노여워 하셨다. 이 글을 볼 일을 없으시겠지만,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비참하게 인어 꼬리를 벗고,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터덜터덜 미팅 장소로 되돌아갔다. 샤워실에서 화이트비치에서 뒹구느라 몸에 잔뜩 묻은 모래를 씻어내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나니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후다닥 그 장소를 벗어나, 도망치듯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 숙소 침대에 누워서, 벌렁이는 심장을 진정시켜야했다. 창피해서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그날의 기억은 여행지에서의 모든 기억보다 날카롭고 또렷하게 남았다. 화이트 비치를 기어다니는 인어공주라니,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다행히 보라카이에 출몰한 인어의 정체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는 듯 했고, 나도 이제는 웃으며 그날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딱 한가지다. 사람들이 안 하는 체험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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