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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로 Sep 14. 2020

가장 힘 빠지는 위로


우리는 누군가를 위로하거나 응원하는 일에 서툴 때가 많다. 누군가의 위로에 오히려 더 힘이 빠진 적이 한 번쯤 있지 않은가. 내 경우엔, "괜찮아, 별 일 아니야."라는 말을 최악이라고 여긴다. 내가 당장 힘들다는데, 일단 공감부터 해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내 주변에도 힘들어 죽겠는데 툭하면 "괜찮아, 잘 될 거야. 별 거 아니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녀석이 하나 있다. 생각만 해도 괘씸하다. 힘든 마음을 위로 하기는커녕, 내가 처한 상황을 축소시키고 힘들다는 말도 못 하게 입막음하는 녀석은... 바로 나다. 그래, 우린 팀워크가 영 별로다.



나는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오려고 하면 그 대가리를 꾹 내리누른 다음에, '이건 일시적인 감정이다. 책에서 읽었는데, OO에 기인한 생각일 뿐이다.'라고 되뇐다. 부정적인 감정에 최대한 무뎌지고 싶었다.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주지화'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스트레스 감정이 사라질 것이라고 여겼으나... 힘든 감정이 지나간 후에는 여지없이 온몸이 아팠다. 마음이 하지 못하는 말을 몸이 하는 셈이었다.



불편한 자리에서 평소보다 훨씬 오버해서 리액션을 하고, 과하게 맞장구치고 웃고, 상대방을 띄워가며 칭찬한 적이 있다. 깔깔깔 웃고 돌아서니 피로가 몰려왔다. 다음 날에는 어깨가 심하게 뭉쳤고, 삭신이 쑤셨다. 누워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내 눈물에 되려 내가 놀랐다. 그렇게 아프고, 눈물도 흘리고 나서야 지난날 무리했다는 걸 깨달았다. '난 괜찮아'라는 말은, 어느 순간 '나는 괜찮아야 해.'가 된다. 괜찮지 않으면 스스로를 원망하고 미워한다. 무심한 주인 탓에 몸뚱이가 고생이다.



또, 한 번은 주변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게 힘들었다. 평소에도 다른 사람 말을 들어주는 쪽이고, 그게 더 마음이 편안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다른 사람의 고민을 듣다 보면 마음이 불편해졌다. 어떻게든 그 고민을 해결해주어야 할 것만 같았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해결책도 내놓았는데 상대의 감정이 한결 나아진 것 같지 않으면 답답하고 짜증스러웠다.



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남에게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일기장에 털어놓거나 고민에 관련된 책을 읽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혼자 해결하고,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남들은 왜 말해봤자 해결도 안 되는 문제에 집착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남에게 얘기해봤자 같이 힘들어지는 게 아닌가?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보면, 나는 부정적인 감정은 숨겨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남에게 힘든 소리를 잘 안 하니, 남들도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고민을 말하는 건 생산적인 행동이 아니고, 부정적인 감정은 나쁘다고 생각했다. 남의 감정을 좋다, 나쁘다 평가하다니. 내가 오만했다.



부정적인 감정을 말하는 것이 과연 생산적이지 못한 일일까? 부정적인 감정을 속으로 삭히다가 신체화 증상이 오는 나를 보면, 차라리 힘들 때 힘들다고 여기저기 말하는 편이 더 건강한 것 같다. 게다가 당장 부정적인 감정이 드는데, "그 감정 멈춰!"라고 한다고 그게 멈춰지는 것인가. 부정적인 감정은 마주쳐도 못 본 척해야 하는 잘못된 감정이 아니다. 그냥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고민을 말하는 상대도, 내가 척척박사처럼 고민을 해결해줄 거라고 기대하는 건 아닐 테다. 그저 누군가에게라도 말하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들 뿐이었을 거다. 나에게 힘든 마음을 토로하면서도, 그걸 듣는 나까지 힘들어질까 봐 걱정해주는 사람들인데. 힘들다는 사람을 앞에 두고 속으로는 '그거 별 거 아니야. 다 지나갈 일이니까 괜찮아.'라고 되뇌고 있었으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앞으로도 대단한 위로의 귀재가 될 자신은 없지만, 자연스러운 감정을 두고 좋네 나쁘네 평가하는 짓은 그만둬야겠다. 일단 나한테 좀 다정다감해져야겠다. "그때 많이 힘들었지? 내가 네 맘 알아, 오늘 맛있는 것 먹을까? 장바구니에 담아둔 책 한 권 사서 읽을까? 나랑 같이 너 힘들게 한 놈 욕할래?" 어르고 달래다 보면, 우리의 팀워크도 좀 더 좋아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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