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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로 Sep 04. 2021

유자막걸리와 치즈 불닭과 사랑이 있는 나의 시댁


<언니네 주막>(이하 '언주')은 내가 다니던 대학교 앞에 위치한 술집이다. 이름과 달리 '언니'가 운영하는 곳은 아니고, 수염이 무성한 남자 사장님이 운영하는 가게다. '언니'라는 건 그저 친근함을 나타내는 장치인 셈이다. 나 역시 그 가게의 이름이 '오빠네 주막'보다는 '언니네 주막'인 편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언니'와 '주막'이라니, 다정한 단어가 두 개나 들어간 술집에 가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사람 팔자는 이름 따라간다던데, 가게 팔자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언주는 이름처럼 다정하고, 과시적이지 않다.


언주는 수많은 술집이 생겼다가 망하는 동안 이정표처럼 같은 자리를 지켰고, 대학 시절의 나는 툭하면 언주에 갔다. 거기서 자지는 않았지만, 음식과 술을 먹고, 나이를 먹고, 배 둘레를 키웠다. 시험 기간 도서관에 박혀있다가 옆자리 친구를 꼬셔서 가고, 개강총회나 종강총회 때도 가고, 아무런 일이 없을 때도 갔다. 모든 강의가 끝나면 언주를 향해 미친 듯이 뛰어갔다. 가게가 아직 오픈 전이라면 편의점 앞 파라솔에서 맥주를 홀짝이며 가게가 오픈하길 기다리고, 심지어는 가게 앞에 놓아둔 의자에 빚쟁이처럼 죽치고 앉아 사장님을 기다리기도 했다.


언주에 가면, 1분 1초도 맨정신인 채로 낭비할 수 없었다. 메뉴판은 이미 외운 지 오래. 메뉴판을 들여다보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메뉴판을 받기도 전에 외쳤다. "여기 유자 막걸리요!" 유자청이 들어간 달달한 유자꿀막걸리는 모두가 좋아하는 술이었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마카로니, 단무지 무침, 연두부와의 궁합도 좋았다. 안주는 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다. 새콤한 오징어 초무침, 단짠단짠 돼지 숙주 볶음... 다 좋았지만, 그중에서도 나의 원픽은 치즈불닭이었다. 치즈 불닭은 매콤달콤한 닭고기와 떡을 노오란 치즈로 두툼하게 장식한 뒤, 깨를 살살 뿌리고, 초록색 고추를 위에 올려 멋을 낸 요리다. 캡사이신을 넣지 않고 오직 청양고추만 사용하여, 장에 무리를 주지 않을 정도의 매운맛이 난다.


죽전 <언니네 주막>


언주를 좋아하는 이유는 유자 막걸리, 치즈 불닭 때문이 맞다. 그러나 그게 시작은 아니었다. 사랑의 시작은 우연에서 비롯됐다. 처음 언주에 가게 된 건, 언주가 그 근방에서 제일 빨리 문을 여는 술집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대학교와 본가는 편도로 2시간 반 거리였다. 학교에서 9시 전에는 출발해야 막차를 놓치지 않고 집에 12시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때문에 나의 사명은 최대한 빠르게, 이른 시간부터 술에 취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후 4시부터 문을 여는 언주와 나는 환상의 콤비(어쩌면 환장의 콤비...)였다. 우린 참 잘 맞았다. 어느 식당을 가든 구석자리를 좋아하는 편인데, 언주는 가운데 공간을 비워두어 모든 좌석이 구석에 있었다. 아늑한 좌석에, 취해도 붉어진 얼굴이 티 나지 않을 정도의 조도. 음악에 관심 없는 사장님이 작게 틀어둔 가요 TOP100과, 지나다니는 학생들이 보이는 넓은 창. 저렴하지만 푸짐하고 맛있는 안주까지. 모든 게 내겐 안성맞춤이었다.


한술 더 떠서 언주는 내게 사랑까지 점지해 주었다. 언주에서 나만의 사명을 훌륭히 수행하다가 학생증을 잃어버렸고, 그 학생증을 언주 알바생이 찾아 주었다. 그 알바생이 바로 나와 6년째 연애 중인 K다. 그가 나에게 고백을 한 곳이 언주고, 우리가 썸을 타던 시절 다니던 데이트 코스는 사장님의 추천 코스였다. 내가 학교 앞에서 자취를 시작한 후에는, 둘이서 툭하면 언주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언주에 가면 사장님은 아직도 자신 덕분에 우리가 이어졌노라 어깨를 으쓱이고, 우리가 결혼하면 비스포크 냉장고를 사주겠다고 한다. 비스포크 냉장고가 좋긴 하지만, 우리의 시작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여기 있다는 게 좋아서, 우리가 만난 6년 동안 수많은 데이트의 배경이 되어준, 가끔 놀러 가면 반겨주는 이가 있는 게 애틋해서, 이곳이 오래오래 문을 열어주길 소망한다.


<아무튼, 술집>에서 김혜경 작가는 술집도 '집'의 일종이라고 주장한다. 그 말에 공감해서 고개를 끄덕이느라 턱이 빠질 뻔했다. 언주도 내겐 집의 일종이다. 집이 별거인가. 편안하고 안전한 기분을 느끼며 쉬는 공간이면 그게 집이지. 뭐, 본가보단 시댁에 가까운 느낌이긴 하지만. (빈손으로 달랑 찾아가서, 술만 잔뜩 마시고 와도 되는 곳이 시댁이라면, 나는 결혼을 지금보다는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었을지도.) 언주엔 사랑도 있고, 추억도 있고, 술도 있다. 평행세계가 존재하여, 언주를 모르고 사는 내가 어딘가 존재한다면, 그 사람과 나는 완전히 별개의 사람일 것이다.


앞서 언주가 우리 대학의 이정표라고 소개했지만, 생각해보면 언주는 그 시절 나의 이정표였는지도 모르겠다. 행복을 가리키는 이정표, 유자 꿀막걸리 한 잔에 힘든 마음은 털어내고, 괜히 다가와서 아는 체 해주는 사장님을 보며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곳. 그때의 고맙고 안도하고 편하고 애틋한 모든 마음을 담아 글을 써본다. 내가 쓴 글이 많은 이들에게 가닿을 일은 없겠지만, 코로나 시국에 술집에 가는 것도 어려운 일이란 걸 알지만. 늘 붐비던 언주가 텅 빈 게 마음이 아파서 여기서 이렇게나마 응원을 건네본다. 그리고 이 글을 보고 언주를 찾는 사람이 있다면, 유자꿀막걸리와 치즈불닭만큼은 꼭 먹고 오시길! 기왕이면 사랑도 행복도 다 만나고 오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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