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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로 Oct 07. 2024

덕질이 체질

3/30


내 덕질의 유효 기간은 일 년이다.


어디까지나 평균을 냈을 때 그 정도라는 의미지 365일이 지나면 '덕질 끝!'을 외치며 다른 대상으로 갈아탄다는 것은 아니다. 갈아타는 이유라고 해 봐야 대단하지 않다. 덕질 대상이 사회면에 이름을 올린 적도, 팬덤 내 알력 다툼에 휘말린 적도 없다. 무언가 내 눈길을 잡아끄는 것이 생기면 기존 덕질 대상의 안녕을 빌어주며 조용히 자리를 떠난다. 휴식기는 정말 바쁠 때(입사 초기라든지 번역 아카데미를 다닐 때라든지)를 제외하면 없다시피 하다.


그러다 보니 덕질 대상보다 '덕질'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생각할 때가 많다.


덕질은 왜 하는 걸까. 좋아하는 가수가 생기면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이름을 검색해 노래를 듣고, 좋아하는 유튜버가 생기면 채널을 구독하면 그만인데 왜 굳이 팬카페를 가입하고, X 계정을 만들고, 소속사에서 올려주는 스케줄 표를 보면서 떡밥의 질을 저울질하고, 퇴근길을 가고, 서포트를 하고, 영업을 하고, 완전한 타인의 성공과 행복을 비는 걸까(내가 전부 한다는 말은 아니다).


첫 번째, 유사연애. 해 본 적 없으니까 패스.


두 번째, 내 취향을 인정받고 싶은 심리.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커진 팬덤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내가 산 주식의 상승세는 곧 내 안목을 인정받는 것이다. 콘서트 티켓이며 굿즈로 돈이 나가더라도 아깝다는 생각 대신 언젠가 돌아올 보상에 가슴이 뛴다.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콘서트 매진 기사와 숫자로 표현되는 초동 판매량은 내 가수의 가치를 높여 줄 것이다. 좁은 트랙 위를 달리는 경쟁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도 이어진다.


세 번째가 복잡한데 다른 사람들도 이런 심리로 덕질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첫눈에 반하는 순간을 예로 들어보자. 사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본질적이면서 총체적인 모습(그런 게 존재하기는 할까)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 든 이미지다. 덕통사고의 순간도 다르지 않다. 트럭처럼 달려와 나를 치고 가는 것은 미디어가 편집한 정보를 기반으로 내가 그린 그림이다. 그리고 그 그림은 자화상과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다.


덕질을 시작하는 나는 머릿속에 흔들리지 않는 상을 구축해 놓고 그것이 맞아 떨어지기만을 기다린다. 독특한 음색?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 가사? 성별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난 토크? 이 모든 것이 남의 손에 들린 확성기에 대고 외치고 싶은 이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대략 일 년. 내 덕질이 일 년을 넘기기 힘든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남이 말해주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글을 쓰든 영상을 만들든 직접 펼쳐 보이면 되지 않나. 팬카페 가입 버튼을 누르려던 손이 멈춘다. 일 년 뒤 굿즈를 서랍 속에 밀어넣고 유튜브 구독 목록을 정리할 내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보통 덕질을 시작하기 전에 이 정도로 고민하나? 다른 사람들은 어떻지? 이럴 바에야 억지로라도 일을 만들어서 휴식기를 가져 볼까?


그러면서도 '이번 덕질은 다르다'라는 생각이 슬금슬금 고개를 디미는 걸 보면 덕질이 체질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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