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의 시대, 연결을 묻다.
이 칼럼 시리즈는 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박사가 자신의 유년 시절과 가족사를 바탕으로, 현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고독, 외로움, 관계의 단절, 독립의 역설을 성찰합니다. 과거의 체험을 통해 오늘의 문제를 되돌아보고, 진정한 연결과 연대의 의미를 모색하며 고독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와 질문을 던집니다.
요즘 서점에 가보면, 온통 고독이라는 책으로 가득하다. 나이가 들면 50대, 60대만 되어도 건강, 금전, 고독이라는 이른바 3K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데 이 고독이라는 감정은 고령이 될수록 점점 깊어지고, 더 무겁게 다가오는 것이 현실이다.
늦가을 밤, 창밖에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 누구나 쉽게 잠들 수 없다. 온갖 생각에 잠을 설치며 이리저리 뒤척이기 일쑤다. 혼자 서재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 보면, 가을밤은 어느새 쓸쓸히 지나가버리고, 외롭고 쓸쓸한 기분은 더욱 깊어진다. 고독이라는 감정은 어쩌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각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이 고독감은 비단 나이 든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도 고독에 대한 민감도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예전에 ‘크리스마스 우울증’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누구나 쇼핑백을 들고 애인을 만나러 가는 사람들을 길거리에서 흔히 보게 된다. 하지만 정작 그런 날 갈 곳도 없고, 만날 친구도 없는 사람들은 더 깊은 고독의 늪에 빠지게 된다.
얼마 전 이태원 참사가 떠오른다. 할로윈 축제 때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을 당했다. 누구나 그 소식을 듣고 가슴 아파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발 디딜 틈도 없는 곳을 왜 굳이 찾아갔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 젊은이들은 스마트폰 없이는 잠시도 견디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지하철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혼자라는 사실이 아프게 다가오고, 잠시의 공백조차 용납되지 않는 모습에서 젊은이들의 고독감이 더 커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고독은 정말 현대인의 가장 무서운 병 중 하나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혼자라는 사실이 더 큰 상처로 다가온다. 나이가 들면 고독사라는 기사까지 신문에 크게 실리곤 한다. 이런 모습만큼은 정말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얼마 전 나는 평생 처음으로 프로야구를 보러 간 적이 있다. 비서와 함께 삼성 라이온즈를 응원하러 갔는데, 마침 우승 후보와의 경기였다. 다행히 삼성의 승리를 보고 기분 좋게 돌아왔다. 물론 내가 삼성의 열렬한 팬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날 그곳을 찾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요즘 들어 그 응원 열기가 너무나 그리웠던 것이다. 점수를 내면 모두 함께 환호하고, 잃으면 모두가 실망하는 그 연대감, 유대감. 그 모습을 스탠드에서 꼭 한 번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간 것인데, 가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고독이라는 병은 현대인의 마음 한켠에 무섭게 자리 잡고 있다. 어릴 적만 해도 이런저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형제들도 많고, 방도 두세 칸뿐인데, 여섯 일곱 남매에 시집 안 간 고모, 장가 안 간 삼촌까지 함께 살았다. 특히 우리 집은 식구가 많았다. 그러니 타향살이 자체가 바로 서럽고 고독한 인생이었다. 우리는 돈을 벌어 금의환향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일까.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고독이라는 병이 유난히 깊이 박혀 있는 듯하다.
요즘 혈연, 학연, 지연이라는 말이 정치적으로도 자주 오르내리는데, 좋은 의미로만 쓰이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이라는 말은 여전히 따뜻하게 마음을 적셔준다. 고향 생각만 해도 저절로 뭉클해지는 것은, 그 뒤엔 외롭고 서러운 타향살이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우리는 혼자 태어나서, 때로는 군중 속에서도 고독을 느끼며 살아간다. 특히 늦가을 밤, 낙엽 지는 소리에 눈물이 절로 나고, 인생의 허무함, 무상함이 가슴을 적신다. 결국, 우리는 혼자 태어나 혼자 살다가 혼자 죽는다는 사실이, 인생의 숙명처럼 다가온다. 많은 작가들이 이 고독이라는 주제를 삶의 본질처럼 이야기하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