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면은 형식이다

이시형 박사 집필 도서 '숙맥도 괜찮아 용기만 있다면'

by 이시형박사

“우리는 왜 이렇게 배짱이 약할까?”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다. 바로 체면이다. 체면과 배짱은 묘하게도 반비례한다. 체면을 지나치게 의식하면 할수록, 내용보다 형식이 앞서고 용기보다 만용이, 실력보다 허세가 힘을 얻는다. 헛된 자존심만 부풀고 실속은 사라진다.


예로부터 우리는 체면을 중히 여겨왔다. ‘양반은 추워도 곁불을 쬐지 않는다’는 말까지 있었으니, 얼어 죽어도 위신은 지켜야 했던 셈이다. 문제는 체면이 삶의 기준이 될 때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왜 유독 우리에게 체면의식이 이렇게 강하게 자리 잡았을까.


그 뿌리는 가난했던 우리의 삶의 방식에 있다. 농경사회 시절, 가을 추수가 끝나면 온 가족이 한 방에 모여 긴 겨울을 났다. 우리나라의 겨울은 길고 춥다. 좁은 공간에서 많은 식구가 함께 지내려면, 각자의 감정과 욕구를 억누르는 수밖에 없었다. 방이 덥다고 함부로 문을 열 수도 없었고, 피곤해도 어른 앞에서는 다리 한 번 제대로 뻗지 못했다.


먹는 문제는 더 절실했다. 늘 부족했기에, 배고프다고 먼저 손을 내밀 수 없었다. 체면 없이 먹겠다고 덤볐다가는 싸움이 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배고파도 아닌 척, 춥지만 괜찮은 척하며 살아야 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마저 체면이라는 이름으로 억제해야 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체면은 가난이 만들어낸 생존의 질서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우리는 더 이상 춥고 배고픈 시대를 살지 않는다. 다리를 뻗고 살 여유도 생겼고, 배부르게 먹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노인이 따로 살아도 될 만큼 생활 여건도 좋아졌다. 그런데도 체면의식은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체면이란 자기 얼굴을 세우는 일 같지만, 실은 남의 눈을 의식하는 타율적 의식이다. 배고파도 아닌 척, 추워도 더운 척하며 나를 숨기는 일이다. 내 형편이 어려워도 남 앞에서는 감춰야 하고, 내 몫의 물을 더 쓰고 싶어도 눈치가 보여 참아야 한다. 이런 체면은 한때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유용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우리를 스스로 옭아매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체면 문화의 가장 큰 약점은 겉과 속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남이 보는 앞에서는 의젓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으면 흐트러진다. 체면은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억지로 하는 느낌이 들고, 남이 안 보는 곳에서는 벗어던지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우리가 법을 지키는 태도에서도 이 차이는 분명히 드러난다. 서양 사람들은 누가 보든 말든 자기 양심에 따라 신호를 지킨다. 우리는 경찰이 있을 때는 잘 지키지만, 아무도 없으면 슬쩍 넘어가기도 한다. 체면이 공공의식의 바탕이 되어온 결과다.


이제는 묻고 싶다. 체면은 과연 지금도 우리가 붙들어야 할 가치인가. 체면을 지키느라 진짜 나를 숨기고, 용기를 잃고, 배짱을 포기한다면 그 체면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체면은 형식일 뿐이다. 삶을 움직이는 힘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고, 허세가 아니라 진심이며, 남의 시선이 아니라 스스로의 기준이다.


살아보니 그렇다. 체면을 내려놓을수록 마음은 가벼워지고, 사람은 오히려 단단해진다. 이제는 형식을 지키느라 삶을 잃기보다, 삶을 지키기 위해 형식을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할 때다.


이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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