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눈치’는 사실 고도의 상황 판단 능력이다.

이시형 박사 집필 도서 '숙맥도 괜찮아 용기만 있다면'

by 이시형박사

아이의 ‘눈치’는 사실 고도의 상황 판단 능력이다.


부모들은 아이가 또래 사이에서 주뼛거리거나, 어른들 눈치를 살피며 행동이 늦어질 때 속이 타들어 간다. "애가 왜 이렇게 당당하지 못할까", "너무 눈치만 보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눈치'라고 부르는 이 행동의 이면에는, 사실 아이의 뇌가 풀가동되어 세상을 정밀하게 분석하는 놀라운 과정이 숨어 있다.


뇌의 두 가지 처리 방식: 속도보다 '정확도'를 택한 아이들

인간의 뇌는 정보를 처리할 때 두 가지 경로를 사용한다.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빠른 경로'와, 정보를 수집하고 종합하여 판단하는 '신중한 경로'다. 흔히 말하는 숙맥형 아이들은 후자의 기능이 탁월하게 발달한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은 상황에 던져졌을 때 단순히 겁을 먹고 멈춰 있는 것이 아니다. 뇌 속에서는 지금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현재의 분위기가 웃어도 되는 상황인지, 아니면 잠시 침묵을 지켜야 하는지를 동시에 계산하고 있다. 남들이 감(感)으로 움직일 때, 이 아이들은 뇌 속에 '정밀한 상황 지도' 한 장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멈춤(Pause)은 실수를 줄이는 고급 기능이다

어른들의 눈에는 아이의 멈칫거림이 '망설임'이나 '자신감 부족'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뇌과학적으로 이는 '정교한 맥락 파악'의 과정이다. 즉각적인 반응이 필요한 단체 활동에서는 조금 뒤처지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장기적으로 볼 때 이들은 상황 판단이 매우 정확한 아이들로 자라난다.

이런 유형의 아이들은 말을 아끼는 대신 실수가 적다. 분위기를 깨는 돌출 행동을 하지 않으며,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는 사회적 지능을 발휘한다. 이들이 가진 '눈치'는 타인을 기쁘게 하기 위한 비굴함이 아니라, 타인과 안전하게 공존하기 위한 '섬세한 레이더'인 셈이다.


어른이 되어 빛을 발하는 '신뢰의 무게'

이런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조직 내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곤 한다. 회의실에서 가장 늦게 입을 열지만, 일단 입을 열면 상황의 핵심을 꿰뚫는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유형이다. 이들은 말을 가볍게 내뱉지 않기에 시간이 갈수록 주변의 깊은 신뢰를 얻는다. 어린 시절 부모를 애태우던 그 '눈치'가 어른이 되어서는 '깊이 있는 통찰력'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부모의 역할: 아이의 속도를 긍정하라

중요한 것은 아이가 자신의 신중함을 '부끄러운 것'으로 느끼지 않게 하는 부모의 태도다. "빨리 반응하지 않아도 괜찮아", "충분히 살펴보고 움직여도 돼"라는 지지를 받을 때, 아이의 뇌는 불안 대신 안정감을 기반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눈치는 약점이 아니다. 세상을 다치지 않고 건너기 위해 잠시 멈추어 서는 능력이다. 우리 아이가 지금 눈치를 보고 있다면, 그것은 아이의 뇌가 세상을 아주 정밀하게 읽어내고 있다는 증거임을 기억하자. 그 섬세한 감각이 잘 자라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 그것이 부모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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