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루코 Feb 09. 2022

내가 만일 무인도에 떨어진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15.


내가 만일 무인도에 떨어진다면 나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느 날 한 친구가 말했다. 무인도에 떨어져도 기필코 살아남을 거라고. 

그때까지 나는 무인도에 떨어져 본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고, 그랬기에 그곳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은 가져볼 수가 없었다. 그 친구는 어쩐지 강해 보이고 단단한 느낌이 있었는데, 친구에겐 있고 내게는 없는 치열함이나 강인함이 혹시 어쩌면 그런 생존 전략이 내게 부재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다. (실제로 그 친구는 흙으로 집을 짓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고, 지렛대의 원리를 찾아보면서 실제 생존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공부한다고 했다.)


막상 무인도에 떨어진다는 것은 지금의 나와 너무 먼 것 같아 상상조차 잘 되지 않아 질문을 조금 바꿔보았다.

 '내가 만일 내 편이 아무도 없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면 나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정도로.


이 험한 세상 속에서 나의 편 하나 없다는 것은 무인도와 크게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나의 숙식을 일정 부분 해결해주는 가족이 없고 나의 불안을 잠재워 줄 연인, 친구가 없다면? 온 마음으로 나를 위로해주는 고양이가 없다면? 사람에게서 받을 수 있는 위로와 응원, 지원이 0인 상태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갑자기 내 요즘의 현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이며 덜컥 무서워졌다. 나는 아마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여태껏 따뜻한 곳에서 잠들고 굶지 않게 살아온 것은 모두 부모님 덕택이다. 제아무리 내가 이 집 안에 살면서 가끔씩 부모님의 끼니를 챙기고 살림에 도움을 보탠다고 할지언정, 내 인생에서 당장 부모님이 사라진다면? 지금 상태대로라면 한 달을 채 버티기도 힘들 것이다. 거기에 잠시나마 신세 질 친구들마저 없다면? 고작 2주 버틸 수 있으려나...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일이 불규칙적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가장 크게는 일이 많이 없었다는 이유로, 나는 '일'이 없는 많은 시간 동안 경제 활동에서만큼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언제 '일'을 하게 될지 모르니 아르바이트라 할지라도 고정적인 일자리를 갖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불편하고 피곤한 에너지만으로 일상을 채우는 것보다 마음을 챙기면서, 내면을 다져가면서 '일'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자고 생각했었다. 딱히 게으름을 피웠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는 정말 열성적으로 내면다지기(?)를 해왔기 때문이리라. 돈이 생기면 그 돈으로 무언가를 배우러 나섰고, 돈이 없으면 집에서 영화든 책이든 먹어치웠다. 다른 방면으로 내가 가진 우울감을 해소하기 위해 글도 써보고 요리도 해보고 유튜브도 해보고. 그렇게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나름 열심히 살았건만, 애석하게도 나의 현재 좌표는 정확했다. 나는 살아남지 못한다. 살아남을 수가 없다. 살아남기에 가장 기본적으로 가져야만 마땅한 돈이, 그 돈이라는 것이 없다. 아예 없다. 없어도 없어도 너무나도 없다. 그냥 아주 모조리 없다. 나는 없다. 돈이. 돈이 없다. 나는 돈이. 돈이 없다. 물론 당장 나의 부모가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며 (벌어지지 말아야 할 것이며), 거기에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약간의 신세를 져도 기꺼워할 친구들까지 한 순간에 사라질 일 또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내 안 어딘가에는 보호막이 있지 않았을까. 의지할 곳 없이 나 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나에게는 너무나 명확한 울타리가 존재했다. 나는 그 울타리 안에서 유유자적하며 삶을 전적으로 책임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아주 애를 쓰지 않아도 내 삶은 사실 안전했다. 나는 기를 쓰고 용을 쓰고 삶에 덤벼들 이유가 그다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힘들 땐 금세 위로를 주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당장 내가 돈이 없다고 굶어 죽지 않으니까. 오늘 밤 잠자리에 위협을 당하지 않으니까.


서른이 넘은지도 몇 년이 지나 벌써 서른 중반에 와 있다. 나는 부모 없이 살 수 없다. 아직은. 어쩌면 그리하여 전적으로 그들을 안아주지 못하는 것이리라. 어딘가에서는 한도 끝도 없이 지켜 주고 싶은 존재들 이건만, 내가 자꾸 그들을 안지 못하는 것은, 사실 그들이 여전히 나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한 부분은 명확하게 안고 있는데 또 한 부분은 명확하게 안기고 있다. 그 둘의 차이에서 우리는 종종 혼란스럽고 서로를 고통스럽게 만들면서 어딘가 묘하게 밸런스가 깨진 채 동행해왔다. 내가 위화감을 느꼈듯 부모도 마찬가지였을텐데, 나는 가끔 있던 그 갈등이 자립하지 못한 내 책임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껴버렸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운수 좋은 날. 몹시 운수가 좋은 날. 이제 '자립'으로 명확히 방향 전환을 한 날.


애썼다고 애써 온 나의 시간들이 조금은 부끄러운 아침이었다. 어쩌면 나이에 맞지 않게 큰 보호 아래에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고, 정말로 내가 부모 없이는 지금 당장 바로 설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마음만 키웠던 시간들이었다. 마음만 키우지 아니하고 내 세상을 키우자고, 그래서 이 세상 속에서 살아남자고, 살아 남아 지킬 것들을 지켜주자고. 오늘은 그런 다짐을 했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기필코 살아남는 사람이 되겠다고, 아주 굳은 결심을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작은 것들로 쌓아올린 아침이 있었기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