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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루코 Feb 08. 2022

작은 것들로 쌓아올린 아침이 있었기에,

14.


모닝 페이지로 아침을 연지도 벌써 이주가 흘렀다. 이주라니! 사흘 정도 되었을 때, 얼마 안 됐지만 효과를 실감한다고 동네방네 모닝 페이지의 효능(?)을 떠들어댔는데, 벌써 14일이 지났다니! 사흘부터 지금까지는 순식간에 시간이 흐른 것 같다. 몸이 때마다 실감하지 못하는 걸 보면 조금씩 이 아침이 나에게 체화되어 정말 일과가 되어가고 있나 보다.


14일 동안 모닝 페이지를 썼다는 것은 14일 동안 아침에 차를 내려 마셨다는 말과도 같은 말일 것이다. 입춘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침은 쌀살해서 몸을 일으켜 책상에 앉으면 몸을 뎁힐 수 있는 따뜻한 차가 필요했다. 원래도 물은 (아무 맛이 없어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 내 몸에 수분을 주기 위해서는 차를 홀짝홀짝 마시는 편이었다. 다행히 집에는 14일 동안 즐기기에 충분한 양의 찻잎들이 있었고, 첫날 페퍼민트차를 시작으로 캐모마일차, 도라지차, 결명자차를 포함하여 다양한 티백 종류로 매일매일 작은 변화를 주며 차를 음미했다.


오늘은 이름 모를 오설록 티백을 우려 마셨다. 티백을 우려 마실 땐 차가 너무 진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티팟의 안쪽 컵에 티백을 넣고 취향껏 우려 마신다. 색이 적당히 진해지면 배출 버튼을 눌러 쪼로로 찻물이 흘러내리고 나는 그것을 또 다른 컵에 쪼로로 따라 마시는 것이다. 그리고 따뜻한 물을 다시 받아와 다시 우리고, 그 과정을 몇 번을 반복한다.


오늘의 모닝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일곱시 반, 조금 늦었지만 그래도 일어나서 이걸 쓰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곧바로 이어 나오는 다음 문장은 이러하다.

'차가 졸졸졸~ 어쩐지 좋다. 쫄쫄쫄~'


이때의 졸졸졸 소리가 선명히 기억이 난다. 막 깬 아침에 가장 선명히 들려오는 소리였고 어쩌면 오늘은 청각에서부터 의식이 깨기 시작했나 보다. 소박하게 손을 움직이면 소박한 음료가 내 앞에 놓여있다. 소박한 향을 내며, 소박한 소리를 내며, 소박한 온도로 오늘의 아침을 따스하게 덮어주면서. 다도의 '다'자도 모르는 내가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티백이든 뭐든 '차'라는 것을 우려먹는, 이런 소박한 행위가 내 삶을 삶답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건강한 삶이라는 것은 아주 작은 것들로부터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작은 것들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리지 못한 삶은 큰 것을 견뎌낼 힘이 없다고, 듬성듬성 쌓인 것은 바람 한 번에도 쉬이 무너지고 만다고.


요즘 내가 보내는 아침 일곱 시부터 열 시까지의 시간은 작은 것들의 향연이다.

일곱 시에 한 번 울리는 알람 소리와 일곱 시 이십 분에 또 한 번 울리는 알람 소리. 그 두 번의 알람 소리 중 하나를 선택해서 기어코 일어나고야 말겠다는 아주 작지만 결연한 의지. 그렇게 부지런한 하루의 시작을 열어주는 고마운 아침의 나. 그리고 이불을 한 차례 털고 보기 좋게 정리해보는 움직임. 이 또한 단 하나도 거창하지 않다. 행위를 말로 옮기니 오히려 행위보다 더 거창해 보일 지경. 그리고 반쯤 감긴 눈으로 오늘 마실 차를 찾고 따뜻한 물을 붓는 거다. 오늘의 컵과 티팟을 들고 책상에 와 앉아 노트를 펼치며 일력을 오늘 날짜로 뜯어 날짜를 적으면서 모닝 페이지가 시작된다.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오늘처럼 쫄쫄쫄~ 이런 식으로. 그리고 밍기적거리고 싶은 마음을 대차게 접어버리고 오르는 왕복 20분의 산행. (늘 덧붙인다. 산이라기보다는 작은 언덕 정도라고.) 5분 정도를 헥헥 대고 올라가면 언덕의 정상에는 정자 하나가 있다. (사실 내가 정한 정상이다. 더 올라갈 곳이 있다고 하더라.) 그곳에서 고요하게 캄 앱과 함께하는 10분 정도의 명상.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아직 코가 시린 날씨, 그것도 산이라고 심장은 콩콩 뛰고 있고 나는 호흡을 차분히 다져가면서 알아차린다. 그게 뭐가 되었든 그냥 알아차리는 거다. 오늘의 명상이 끝나면 이어폰을 빼서 새소리를 듣는다. (신기하게 여러 새가 미친 듯이 지저귄다. 진짜 여기저기서 진짜 마구잡이로 울어댄다. 까악 까악 빠박빠박 삐이이이이 깍 뽝뽝) 조금 다른 호흡으로 산을 내려와 집에 오면 일본어 단어를 외운다. 귀엽게 여섯 개. 그리고 20분가량의 일본 애니메이션 한 편.(요즘엔 나만이 없는 거리를 열심히 돌려 보고 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 대략 열 시 전후이다. 이 행위 중 거창한 행위는 하나도 없다. 무리한 운동도 없고 다 가볍게, 때론 기분에 따라 대체하면서 (예를 들면 산행 대신 10분 요가를 한다던가) 그날그날 컨디션에 맞게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거나.


촘촘한 작은 행위들이 모여 열 시가 되면, 오히려 무언가를 할 힘이 생겨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작은 행위들이 쌓여 조금 더 큰 행위도 쉽게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준비 운동을 한 기분이랄까? 조금 크다고 여겨졌던 행위들이 실제로 커 보이지 않는 효과도 있다. 가령 무지막지 긴 대본을 외우는 일은 언제나 나에게 약간의 스트레스였다. 펼치기도 조금 귀찮아 게으름 피우고 싶었던, 끝까지 미루고 싶었던. 하지만 촘촘히 쌓아 올린 아침을 보낸 뒤엔 마치 어떤 흐름을 타서 그냥 그 흐름이 나를 이끌고 대본을 외우도록 도운다. 그렇게 흐름을 타서 하는 일들에는 그다지 어렵다는 생각이나 불편한 감정이 끼어들지 않는다. 보다 손쉽게 처리해낸다.


작게 쌓아 올린 아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하루하루의 성과가 하루하루 더해지고 있다. 차를 내리는 졸졸졸 소리로 의식을 깨우면서, 작은 마음의 변화를 알아차리면서, 사소하고 소소한 순간들을 실감하면서. 큼직큼직하게 보면 내일도 같은 하루일 것이다. 비슷한 시간에 깨서 비슷한 일과로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새로운 것들이 쏟아지는 하루일 것이다. 내일의 졸졸졸 소리는 오늘과 어떻게 다를까, 내일의 차는 어떤 맛일까. 내일은 어떤 마음을 시작으로 모닝 페이지를 열게 될까. 내일은 어느 글을 읽을까, 어떤 식으로 하루를 메우게 될까.

오늘은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잠들 것 같다. 어쩐지 오늘은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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