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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루코 Feb 09. 2022

내 세상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확장하고 있다고.

16.


오늘은 눈을 뜨자마자 속이 갑갑했다. 숨을 크게 마시고 크게 뱉어야 겨우 숨이 쉬어지는 느낌. 가끔 이런 상태가 되면 조금 당혹스럽다. 애초에 어딘가 살짝 어긋났고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위에 무언가가 얹어진 채 몇 겹의 시간이 쌓이면 이 상태가 찾아오는 것 같다. 숨이 답답한 정도로 그치니 다행이다, 참 간만이다 너, 불쾌하게 안녕... 하면서 이 상태를 맞이해야만 했다. 맞이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더 나빠지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어긋났다면 어디가 어긋난 건지, 공백이 생겼다면 어디에 공백이 생겼던 건지 짚어보며 모닝 페이지를 써 내려갔지만 답은 찾을 수 없었다. 마무리 즈음엔 방향을 틀어서 그래서 지금 내가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지 잠시 떠올렸다. 


고요한 내면, 평화, 흔들림 없이 품는 마음, 앞을 향해 걸어가는 단단함.


급물살에 아무것도 못하고 떠내려가는 신세로 전락하지 않고, 물살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와 이 흐름을 살펴보는 것. 모든 감정과 상황의 주인이 되는 것. 아예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궤도를 수정하고 바로 그 지점에서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는 것. 


매일 나를 살펴본다는 것이 어쩐지 쉬운 일만은 아니다. 매일 나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일이 매일같이 잘 되지는 않는다. 매일 희망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은 때론 매일 무너지는 과정을 느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루는 맑았으니 하루는 흐릴 수도 있다고, 하루는 매우 당찼으니 하루는 조금 쪼그라들 수도 있다고. 모든 것이 좋기만 하다면 인생이랄 게 뭐 있을까, 조금의 노력으로 금세 평안에 다다를 수 있다면 인생은 고통이라는 붓다의 말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겠지. 어쩌면 이바라기 노리코 시인의 시구처럼 죽음이 상태이고 삶이 아름다운 신기루 인지도 모르지. 정호승 시인의 시구처럼 장미는 꽃이 아니라 가시에서 향기가 나는 것인지도 모르지. 어쩌면 삶은 고통스러운 가운데에 잠시 희망이 비추는 것인지도... 그러니까 오늘같이 아주 어려운 날들이 인생 자체인지도 모른다. 삶을 꼬박꼬박 밟아가다 보면 느끼는 감정이 여럿이다. 용기가 샘솟는 날엔 그 용기가 선명하게 느껴지고, 불안이 덮쳐오는 날엔 그 불안마저 선명해서 온 몸이 베이는 기분이다. 그러니까, 오늘의 빌어먹을(?) 상태는 아주 열심히 살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해 보기로 한다. 모든 과정 사이사이를 몸으로 감각하면서 좋은 날만을 꿈꾸지 아니하면서, 이 또한 삶의 일부라고 긍정하면서. 그러니까 나는 지금 느낄 수 있는 감정의 폭이 커지는 중인 거고, 내 세상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암, 그렇고 말고. 


여전히 갑갑한 마음을 데리고 뚜벅뚜벅 오늘의 산을 올랐다. 매번 나무 위에 청설모를 보기는 했었는데, 오늘은 정말 가까이에서, 나와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무언가 찾아 헤매는 청설모와 눈이 딱 마주쳤다. 청설모는 내 눈치를 보는 느낌이었다. 일로 갈까 절로 갈까 고민하면서 우왕좌왕하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고 나무 위로 올라갔다. 몇 초의 시간이었다. 존재와 존재의 마주침 안에서 1초 이상의 시간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다. 꽤 긴 시간 서로를 인지하고 있었다. 나는 청설모를, 청설모는 나를. 그 순간이 너무 신기하고 오묘하고 요상해서 나는 일순간에 선물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아주 사소한 일이었지만 충격적이었고, 그 자그마한 충격으로 조금은 숨쉬기가 편안해졌으니 말이다. 


청설모는 나무로 오르기로 결심하고선 호다다닥 나무 위로 올라가서는 그 이후로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청설모가 물고 간 회색깔 무언가가 신경이 쓰여 계속 바라보다가 눈으로 좇지 못할 만큼 멀어졌을 때 발길을 돌렸다. 혹시 청설모가 사람들이 밤을 너무 많이 가져가서 굶주렸을까? 단지 그것만이 너무나 걱정이었다. 그 생각은 곧 사람이 문제야, 역시 인간이 악이다!로 이어졌고, 나는 인간 혐오자가 되어 잠시간 씩씩댔다. 하지만 나도 인간이 아닌가, 그 혐오는 나에게까지 이어져 나는 또 숨이... 앗...


나에 대한 자애심, 사람에 대한, 자연에 대한 무너진 자애심을 회복하기 위해 오늘은 자애심 관련 명상을 했다. 살짝 눈물이 고였지만 나를 연민하며 눈물을 흘리고 싶지는 않아서 더 강한 마음을 품고 눈물을 이겨내 보았다. 어쩌면 외면한 것인지도. 그래도 어쨌거나 아까보다 빈 마음으로 내려오는데, 어제 한참 바라보고 있던 나무가 오늘도 눈에 들어왔다. 흙 밑에선 다른 나무들과 뿌리로 닿아있을지 모르겠지만, 흙 위에서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외따로 우뚝 서 있는 소나무. '아, 이 산에서 좋아하는 나무가 생겨버렸네, 역시. 이 뒷동산과 좀 친해졌구나.' 하면서 그 나무에게 인사를 하러 숲 길을 헤쳐 갔다. 그리고 나무를 온몸으로 안았다. 아니, 사실 안겼다. 그리고 나무에게 말했다. 오늘은 네가 나를 도와달라고. 내가 기운을 차리고 너를 안아줄 수 있게 되기까지 오늘은 네가 기운을 달라고. 이 산에 있는 많은 나무 중 네가 가장 온전해 보인다고. 그러니까 오늘은 네가 나를 좀 지지해 달라고. 눈을 감고 나무를 안은 채 아마도 몇 분이 흘렀다. (아까도 말했든 존재와 존재의 마주침엔 몇 초도 긴데, 몇 분은 진짜 긴 거다.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제발 아무도 보지 못했기를.) 몇 분이 흘렀지만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생명과 생명이 꼬옥 붙어있었으니 나무는 알아차렸으리라. 나는 분명 기운을 받았으리라.


눈을 뜨고 나무 옆 쪽을 바라보니 저 밑까지 온통 무덤이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이곳에 잠들어 있었구나!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너무나 많은 무엇들에게 들킨 기분이었다. 나는 갑자기 묵념을 했고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천국이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무엇에도 기대지 못해 나무를 끌어안고 있었던 것을 못 본 척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기도해줄게, 못 본 척해줄래? 일종의 거래였다. 우스운 전개이지만 그러고 나니 갑자기 나도 응원받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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