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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민 Mar 16. 2016

[사람숲 단상] 행동가와 평론가


"도둑 걱정해서 벗어나지 못하여 그렇게 조심을 했건만 어느날 밤 다시 도둑이 들어와 당나귀를 훔쳐 가는 바람에 나스레딘 호자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급히 뒤쫓아가 보았으나 도둑은 잡히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동네 다방에 갔다. 그곳에 모임 이웃들에게 당나귀를 도둑맞은 사실을 얘기하자 이웃들은 호자에게 위로의 말 대신 책망의 말들을 쏟아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당나귀 우리를 자물쇠로 잘 채워 갔어야 되는 것 아니오?"

"어째 그리 부주의하셨소! 도둑들은 어디서나 찾아 온다는 말이 있지 않소."

"눈에 흙이 들어가는 순간에도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 계실 참이오? 도둑이 들어오는 소리가 안들렸단 말이오?"

 

계속해서 쏟아지는 비난의 소리를 듣고 있던 나스레딘 호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 자녀의 자네들 말이 옳아. 우리에게도 잘못이 있지. 하지만 당나귀를 훔쳐간 도둑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단 말인가?"" -이양준 <행복한 바보>


13세기 터키에 살았던 나스레딘 호자는 해학과 유머로 일반인의 삶을 깨우쳤던 현자입니다. 그는 당나귀를 도둑맞은 사건을 통해 위로가 아닌 비난의 말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는 누구의 잘못이 큰가라고 되묻고 있습니다.


종종 어느 사건이 터지면 여기저기서 전문가들의 평론이 쏟아집니다. 그 평론은 전문가들의 영역이긴 하지만 결국 한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해일 뿐입니다. 평론가는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파해치고 들여보는 사람입니다. 물론 정확한 판단에 근거한 평가를 통해 다시 사건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반복되는 사건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평론가가 많고 인기가 있다는 건 앞서 가는 게 아니라 뒤에서 살펴본다는 판단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좌절과 실패가 두려워서 다시 도전이 하지 않는 사회일수록 평론가가 많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 삶은 새로움의 연속입니다. 기업도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평론이 있기 전에 불확실한 미래이지만 그럼에도 예측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가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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