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바로 뒤에는 조그만 동산이 있었다. 당시 경상도 사투리로 “밋등”이라 불렀는데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냥 불렀다. 지금 생각해보니 민둥산이었다.
약간 경사진 이 동산에는 조그만 산소 하나가 있었는데 평소 관리도 잘 되지 않았다. 아이들이 워낙 산소 위에 올라가서 놀다보니 가운데 잔디가 거의 다 벗겨진, 사람으로 치면 원형탈모증 걸린 대머리 산소에 가까웠다. 볼품없는 무덤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산소가 있는 민둥산은 그래도 지금으로 치면 천연잔디였다.
이 천연잔디에서 각종 놀이와 소 풀 뜯어먹이기, 축구, 야구 등 그야말로 우리들의 종합운동장 같은 곳이었다.
이런 동산을 원했지만 상상속의 동산일 뿐이었다.
실제는 이처럼 볼품이 없었던 걸로 추억한다.
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의 하나인 스포츠 활성화로 프로야구가 개막하자 우리들도 거기에 발맞춰 야구를 시작하였다. 시골이라 제대로 된 야구용품이 없어 가죽 글러브 대신 비료푸대를 삼각형으로 접어 글러브를 대신했고, 포수는 헬맷이 없어 공에 맞으면 위험하니 사람대신 나무 판자대기에 스트라이크존을 그려서 세워놓고 투수가 던졌다.
값싼 축구공을 구해와서는 프로 축구 흉내도 내었다. 민둥산이 경사졌기 때문에 위쪽에서 공격하는 팀이 유리했다. 민둥산 잔디구장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는 곳이어서 너무 세게 차면 공이 밑으로 내려갔지만 우린 위험을 무릎쓰고 넝쿨을 잡아가며 내려가서 다시 공을 가져오곤 했다.
민둥산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숲속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우리들만의 아지트를 만들었다. 먼저 풀이 무성한 바닥을 발로 밟아서 평평하게 만들고, 우거진 나뭇가지를 꺾거나 휘어서 지붕을 만들었다. 좀 더 위장을 하기 위해 푸른 잎의 나뭇가지를 잘라서 윗 지붕에 얹어 주었다. 옆쪽에도 나뭇가지로 벽처럼 위장했고 출입문도 그럴싸하게 만들었다. 우리들만의 전문용어로 ‘본부’였다.
튼튼하게 만든 본부는 다음 번에 오더라도 그대로 사용했다. 우린 계급을 만들어 병정놀이 하듯 했고, 열매같은 먹을 것도 따다가 식량을 비축해 두곤했다.
민둥산 바로 뒤 숲속에서는 전쟁놀이를 많이 했다.
나무가 천지빼까리라서 총모양의 가지를 꺾으면 바로 장난감 총이 되어 총싸움을 했고, 곧고 긴 나무는 칼이 되어 적당히 잘라서 칼싸움을 했다.
한 번은 나무가 곧고 아주 좋길래 잘라서 손질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옻나무였다. 얼굴에 온통 옻이 올라 고생한 적이 있었는데 다행히 여름방학이라서 학교가서 망신 당할 일은 면했다.
동산에서 뛰어놀던 사진을 구하기 힘들어 동화책 속 그림으로 겨우 대체함.
그리고 무엇보다 민둥산에서 기억에 남는 전쟁 놀이는 바로 활쏘기였다.
잘 휘어지는 나무나 대나무를 이용해서 활을 만들고 아직 덜 자란 대나무 중에서 곧은 나무를 골라 화살을 만들었다. 이때 화살의 핵심은 조금이라도 휘어져 있으면 활을 쏠 때 엉뚱한 방향으로 휘어져 날아가기 일쑤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최대한 곧은 대나무를 골라야만 했다. 화살 맨 앞쪽에 못을 박아 그럴싸하게 만든 다음 활시위를 당겨 큰 나무를 과녁으로 생각하고 조준했다.
활시위를 당겨서 놓는 순간 “슝”하고 날아가 나무에 꽂히는 그 짜릿함이란..
어느날은 곧은 대나무가 없어 어쩔수없이 조금 휘어진 대나무로 화살을 만들었다.
휘어져 날아갈거란 예상은 이미 하고 화살을 쐈다. 아니나다를까 조준한 나무를 피해 바로 왼쪽 옆나무에 꽂히고 말았다.
“하하하. 화살 잘못 만들었네!! 고물딱지 화살이다!!” 다른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난 다시 그 화살을 쐈다. 역시 조준한 나무를 피해 왼쪽 옆나무에 꽂혔다.
“그냥 마 갖다버리라!!” 아이들은 또 웃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꾀를 내어 일부러 조준한 나무 오른쪽을 향해 쐈다.
그제서야 휘어지며 그 나무에 꽂혔다.
“니 화살은 삐딱하게 조준해야 바로 맞는 화살이다. 웃기네. 하하!!”
아이들은 비웃었지만 순간 내 머릿속에는 뭔가가 떠올랐다.
‘휘어지는 화살이라..’
이번에는 목표한 나무에서 좀더 오른쪽으로 각도를 크게 해서 더 세게 활시위를 당겼다.
“슝”,“탁!” 그랬더니 그 나무 오른쪽을 살짝 지나 휘어지더니 바로 뒤에 있는 나무에 꽂힌 것이다.
비록 정 가운데는 못 맞혔지만 앞나무에 가려진 바로 뒤에 나무를 맞힌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윽!” 순간 아이들은 자신들이 화살에 맞은 듯 아무말 못하고 있었다. 오직 침묵만이 나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앗싸라비아!!” 난 쾌재를 부르며 그 화살을 다시 가져와서 활시위에 걸었다.
“다시 한 번 해봐! 그걸로 숨어있는 적들을 맞출 수도 있겠는데!!” 어느새 아이들은 나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난 다시 앞나무를 조준하는 척 하며 휘어지는 각도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앞나무를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뒤에 나무를 명중시키기 위한 좀더 세밀한 눈썰미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슝”, “탁!” 역시 멋지게 휘어지더니 뒤에 있는 나무 중간즈음에 그대로 꽂혔다. 난 으시대며,
“느그들 잘봤제? 뒤에 숨어있는 놈들을 맞출 수 있는 화살을 내가 발명했뿟다!!”
지금 생각하니 바로 ‘최종병기 활은 내가 시초였던 것이다.’
작년 명절 날 고향에 가서 몇 십년만에 민둥산에 올라가봤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는지 그 무덤 위에는 무성한 풀이 자라서 더 이상 대머리 무덤이 아니었다.
정작 내 머리는 탈모가 생겨 저 무덤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민둥산 옆으로는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생겼을 뿐 예전 모습을 거의 간직하고 있었다.
세월이 지났어도 자연은 변함없음을 또 한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무성한 풀을 바라보며 옛 시절의 감상에 잠시 빠져있었다.
‘이젠 시골 동네에는 뛰어놀 어린 아이들도 없으니 더 이상 민둥산이 될 리는 없겠구나!’하는 생각만을 남긴 채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