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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골 일기

네 번째 일기 : 우리들의 놀이터, 마을 회관 골목!!

세 번째 일기에서 뒷산이 천연잔디라면 동네 회관 골목은 천연 흙운동장?이었다. 잔디에서 할 수 없는 자치기, 땅따먹기, 오징어 게임이 아닌 오징어 육군, 비석 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여자들은 고무줄놀이 등 나름 장점이 있었다.

한 가지 불편한 점은 동네 사람들이 자주 지나가는 길이라 놀이하는 중간에 흐름이 끊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감히 우리가 노는데 어른들이 방해를 해?'라고 생각하고는 전혀 미안한 감이 없었다.


시골 동네가 크지 않아서 마을회관 골목에 있다보면 만날 사람 다 만난다. 나이가 드셔서 일 안 하시는 마을 어르신들, 리어카 끌고 농사일 나가시는 아저씨들, 머리에 물동이 이고 지나가는 아낙네들, 삽들고 논에 나가는 젊은 청년들. 심지어 소새끼와 똥개도 지나간다.


이 중에 제일 부러웠던 분들이 일 안 하시는 마을 어르신들이었다. 곰방대 딱 물고 연기를 뻐끔뻐끔 피우며 마을이 잘 돌아가나 살피신다. 더운 여름이면 그늘진 마을회관 어귀에 앉아 계셨고, 추운 겨울이면 햇볕이 있는 담벼락에 앉아 우리가 알아 듣지도 못하는 말씀들을 나누고 계셨다. 진정한 '한량'이셨다.


우리들은 항상 마을회관 골목을 운동장 삼아 진지한 자세로 모든 놀이를 즐기기 시작했다.

자치기는 어미자와 새끼자만 있으면 언제든 가능한 놀이였다. 어떻게 보면 우리 조상들이 야구를 생각해서 만든 놀이가 아닌가 하는 선견지명?이 보이는 놀이였다. 처음에 자치기의 '자'가 무슨 뜻인지도 몰라서 단지 학용품의 자처럼 생겨서 자라고 생각했다. 근데 나중에 알고보니 어느정도 맞아 떨어졌다. ‘자치기’의 ‘자’는 길이를 재는 도구인 '척(尺)'을 말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야구처럼 타율 좋은 타자가 필요한 놀이었다. 난 공중에서 헛스윙만 실컷 하고 새끼자는 공중회전만 여러 번 하다 불완전 착지로 끝나고 말았다. (음... 역시 착지는 김연아가 최고였다!)

가끔은 홈런을 치는 바람에 담벼락 넘어 마을회관 옆집으로 넘어가서 욕을 먹는 경우도 있었다.


땅따먹기는 무엇보다 지금의 알까기나 병뚜껑 멀리 보내기처럼 손가락으로 돌을 튕길 때 힘 조절이 중요했다.(음... 그때 'F=ma' 공식을 알았더라면 동네 땅은 모두 내꺼였을텐데..)

이 놀이는 어린아이 때부터 투기?를 조장시켜 부동산 시장의 근간을 흔들어 놓는 놀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오징어 육군은 육박전 비슷한 격투기? 놀이쯤 되었다. 그래서 오징어 육군을 하게 되면 마을회관 골목은 격투기장으로 변신한다. 아무래도 덩치 크고 힘센 놈이 유리하다. 난 몸이 왜소하고 힘도 없어서 오징어 육군을 별로 좋아하진 않았다. 특히, 나보다 나이 어린애한테 힘에 밀려 아웃되면 개망신이었다. 이 놀이를 하고나면 옷에 흙이 잔뜩 묻어 있거나 옷이 찢어져 있는 영광의 흔적을 남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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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치기는 납작하고 잘 세워지는 돌을 먼저 구하는게 관건이었다. 시골에서는 널린 게 돌이였으니 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약 5미터 쯤 되는 거리에서 상대방 비석을 세워 놓고 맞추는 놀이였다. 단순히 손으로 던져서 맞추는 것 이외에도 밑에 그림처럼 여러가지 미션이 있다. 순서대로 다 맞춰야 이기는 것이다. 한발 뛰고 맞추기, 배에 올리고 맞추기, 어깨 올리고 맞추기 등 뒤로 가면 갈수록 고난이도 기술을 요한다.














구슬치기는 구슬을 문구사에서 구입해야 하므로 초기 자본이 필요한 놀이였다.

구슬을 치다 보면 깨지는 경우가 있어 상품가치가 떨어졌다. 땅에 구멍을 파서 넣기도 하고 삼각형을 그려서 그 안에 구슬을 밖으로 빼내서 하는 놀이도 있었다.


딱지치기는 힘과 기술을 동시에 요하는 놀이였다. tv에서는 그냥 힘으로만 위에서 내려쳐서 뒤집는 것만 보여주던데 우리 시골에서는 한쪽 발로 상대방 딱지 가까이에 댄 다음 옆으로 쳐서 발을 댄 발등쪽으로 넘기는 기술도 있었다. (그림 참조)

딱지치기

이것 역시 'F=ma' 공식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었다. 딱지가 잘 뒤집히지 않게 하기 위해 종이 여러 장을 겹쳐 뚱뚱하게 만들어 경기에 임하는 아이도 있었다. 무게가 나가서 잘 뒤집히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여러장 겹쳤기 때문에 바닥에 놓으면 딱지가 납작하지 않고 옆 공간이 뜨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오히려 앞에 설명한 것처럼 한쪽 발로 대고 옆에서 치면 그냥 넘어가는 수도 있었다.


여자애들을 주로 고무줄 하나로 놀이를 했던 걸로 기억한다. 노래를 부르며 발을 번갈아가며 고무줄 위로 올려가며 새침하게 놀았다. 어딜가나 장난끼 많은 남자애들이 고무줄을 끊어버리는 대형참사?를 일으킨다.

한 번은 한 아이가 이빨로 고무줄을 끊어버리는 것을 보고는 "쟤는 이빨과 턱주가리가 엄청 튼튼하구나!"하고 감탄을 자아냈다.

8da3066c-b4de-48.png 고무줄 놀이

마을 회관 마당을 가장 넓게 사용한 놀이는 바로 다방구(또는 다망구)였다.

주로 전봇대를 진으로 지정한 뒤에 술래를 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달아나서 열심히 숨는다. 술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최대한 엄폐와 은폐 작전을 펼치며 꼭꼭 숨어서 스릴을 즐겼다. 마치 우리는 형사와 도둑놈이 되어 쫓고 쫓기는 필사의 추격전을 벌였다.


이 모든 놀이들이 마을회관 골목이 흙이라서 가능한 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우리들에게 들렸다. 동네 골목길에 시멘트를 깐단다.

"시멘트?? 아니, 쎄멘!!, 콘크리트?? 아니, 공구리!!" 우리들은 분노하고 또 분노했다. 일제 강점기에 맞선 독립투사처럼 되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리들이 놀지 못하게 이 자연의 흙을 쎄멘으로 묻어버린다고??" 당시 우리들은 여름방학이 끝나가는 슬픔을 안고 있었는데 그것보다 더더더더더.... 슬펐다.

그동안 매일 마을회관 골목을 점령하고 있던 우린 온갖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쎄멘이 깔리면 더 이상 재밌는 놀이는 불가능하다. 놀다가 자빠지면 많이 아프고 다치기 일쑤다. 할 수 있는 놀이라곤 다방구, 공놀이 정도...


" 감히 우리 점령군 허락없이 어른들 지 맘대로 대규모 사업을 벌이다니!! 동네 이장과 정책 토론이라도 해야하나???"


시멘트를 까는 이유가 맨땅에서는 비만 오면 진흙탕으로 변해 사람 뿐만 아니라 리어카, 경운기가 다니기 불편하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우린 그딴거 모른다. 우리 알바 아니다!!

우리에겐 오직 재미있게 노는 게 삶의 전부였다!!

결국 우리들은 제대로 된 저항 흉내도 내지 못한 채 어른들의 횡포?에 자연속의 흙운동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삶의 터전을 잃은 우리들은 다시 민둥산이 있는 뒷산으로 피난을 가서 놀 수 밖에 없었다.




요즘은 흙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젠 학교 운동장 조차도 인조잔디나 트랙으로 뒤덮혀 아이들은 흙냄새도 못 맡게 되었다. 기껏해야 학교나 동네 놀이터 정도?


시멘트와 아스팔트 밑에 파묻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흙들이 불쌍하기만 할 따름이다.


지금의 애들은 집에서 게임하면서 머릿속이 상상의 놀이터라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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