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함께한 가오슝의 하루

패키지여행만 알던 엄마의 새로운 발걸음

by 문 달

엄마는 늘 친구들과 여행을 갈 때면 패키지여행만 다녔다.
정해진 시간표에 맞춰 아침부터 서둘러 버스에 오르고, 가이드가 들려주는 설명을 들으며 관광지를 도는 여행. 물론 편하고 안전하지만, 여행이라기보다 ‘견학’에 가까웠다.
엄마에게 여행은 그런 거였다.


틀을 벗어난 첫걸음


“너랑 오니까 지하철 타는 것도 재미있네.”

그 말은 가오슝의 지하철 플랫폼에서 나왔다.

주황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美麗島’라고 쓰인 역명판 앞에서, 엄마는 내게 브이(V) 포즈를 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엄마에게 여행이란, 교통수단부터 호텔, 식사까지 전부 정해진 틀 안에 있던 것이었고, 내가 그 틀을 조금 흔들어준 거라는 걸. 엄마는 노선도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이제는 혼자서도 갈 수 있을 것 같다”며 웃었다.

그 웃음 속엔 작지만 단단한 자신감이 스며 있었다.


점심은 근처 로컬 식당에서 먹었다. 문을 열자마자 코끝에 기름 냄새와 함께, 어수선한 식기 소리가 귀를 채웠다. 한자 메뉴판을 해석하느라 잠시 헤맸지만, 옆 테이블 사람들이 먹던 국수와 돼지고기 덮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주문했다. 뜨거운 국물에서 익숙하지 않은 향이 은근하게 올라오자, 엄마는 젓가락을 멈추고 물었다.


“이건 무슨 향이야?”


나는 “고수 아닐까?”라고 대답했다. 엄마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상한데... 또 먹고 싶네”라며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낯선 것을 받아들이는 작은 용기가 있었다.


점심을 먹고 가오슝에서 유명하다는 망고빙수 집으로 향했다. 얼음 위에 가득 올린 잘 익은 망고와 연유, 그리고 부드러운 아이스크림.

숟가락이 얼음 사이를 가르자 시원한 김이 피어올랐다. 엄마는 한 숟갈을 먹고는 “이건 사진 찍어놔야겠다”며 빙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햇살이 들어오는 입구 쪽에서 빙수를 찍는 엄마의 표정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평소 음식 사진에 관심이 없던 엄마였기에, 그 모습이 더 새로웠다.


바닷바람과 석양

오후에는 시즈완(西子灣)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
버스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자, 엄마는 조용히 창틀에 팔을 올리고 바람을 느꼈다.
“이런 바다는 TV에서만 보던 건데.”
그 목소리엔 놀람보다 여유가 더 크게 묻어 있었다


해안가에 도착하자, 짙푸른 바다와 부드러운 파도가 시야 가득 펼쳐졌다. 해안 산책로를 걷던 엄마는 파도가 스치는 물가에서 멈춰 섰다. 물에 발을 담그진 않았지만, 파도의 결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그 모습은 마치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하겠다’는 다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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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날의 여유

마지막 날은 특별한 계획 없이 바닷가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가오슝의 하늘은 생각보다 맑았고, 바람은 습기를 품고 있었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전날의 해안이 탁 트인 바다였다면, 오늘은 항구와 건물들이 어우러진 바다였다.
고요한 수면 위로 작은 배들이 천천히 드나들었다.


점심 무렵, 우리는 써니힐(SunnyHills) 파인애플과자 가게에 들렀다. 따뜻한 차와 함께 나온 파인애플과자는 달콤하면서도 과육의 결이 살아 있었다. 엄마는 포장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이건 집에 사 가야겠다”며 작은 봉지를 골랐다.


가게를 나와 바닷가를 따라 걷다,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 안에는 잔잔한 음악이 흘렀고, 창밖 바다 위에는 배들이 느릿하게 지나갔다. 엄마는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창밖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석양이 물드는 시각,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바다를 바라봤다. 노을빛이 바다와 하늘, 그리고 엄마의 얼굴을 물들이는 그 순간, 이 여행이 엄마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지 궁금해졌다.


아마 ‘편한 여행’이라는 정의가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다. 정해진 시간표 대신,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걸어가는 즐거움. 그 자유 속에서 만난 새로운 풍경과 맛, 그리고 나와의 대화.

공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말했다.

“다음엔 어디 가볼까?”


그 말이 이 여행의 가장 긴 여운이었다.



에필로그

패키지여행만 다니던 엄마는 이번 가오슝에서 ‘길 위의 여유’를 배웠다.

그리고 나는, 그 여유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깨달았다.

여행의 풍경은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지만,

그날 엄마가 지하철 플랫폼에서 지은 웃음은 오래도록 선명하게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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