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찍은 여권 도장, 그 설렘의 무게

낯선 세상과의 첫 악수

by 문 달


여권 한 장 속의 빈 페이지는 내게 세계로 통하는 초대장이었다.
두툼한 표지를 넘기면, 아무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은 눈밭 같은 하얀 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위에 나만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여권을 발급받으러 구청에 갔던 날이 아직도 선명하다. 대기표를 뽑아 들고, 낯선 민원실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주변에는 출장 준비로 분주한 직장인, 여행 가방을 끌고 온 사람, 가족끼리 모여 앉아 사진을 확인하는 아이들까지...
그 속에서 나는 혼자 서류를 꼭 쥐고 있었다.


며칠 뒤, 손에 쥔 여권은 생각보다 작고 가벼웠다.
하지만 그 무게는 종이 몇 장이 아닌,
아직 보지 못한 세상 전부 같았다.
빈 페이지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어서 와. 네 이야기를 여기에 남겨봐.”


첫 여행지를 정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비행시간이 짧고, 혼자서도 다닐 수 있는 곳.
비행기 표를 결제하는 순간, 화면 속 ‘결제 완료’ 글자가 여행이 시작됐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짐을 싸면서는 설렘과 걱정이 번갈아 찾아왔다.
혹시 길을 잃으면 어쩌지?
언어가 안 통하면 어떻게 하지?
그럼에도 마음은 이미 비행기 안에 올라 있었다.

출국 당일, 공항의 공기는 묘했다.
커피 향, 캐리어 바퀴가 바닥을 긁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안내 방송...
모든 것이 ‘출발’이라는 단어로 나를 감싸고 있었다.



심사대 앞에 섰을 때 손바닥에 땀이 났다.
직원은 무표정하게 여권을 펼쳤고,
작은 입국 스티커가 조심스럽게 붙여졌다.

조용했지만, 그 순간 숨이 깊어지고 가슴이 묵직하게 뛰었다.


마치 나를 인정해 주는 합격 도장 같았다.
이제 나는 ‘해외여행을 해본 사람’이 되었다.


도착한 공항에서 입국 심사를 마치고,
낯선 공기의 온도와 냄새를 느꼈다.
첫 도장은 단순한 입국 허가가 아니었다.
그건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첫 번째 다리,
낯선 세상과의 첫 악수였다.


그리고 그 악수는, 나를 앞으로 수많은 길 위에 서게 만들었다. 그 순간 이후, 나의 일상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두려움과 서툼을 넘어선, 변해버린 나의 일상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여행을 일찍 시작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예전의 나였다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는 대학 시절에도, 사회 초년생이었을 때도 해외여행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그 한 걸음이 내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믿는다.


첫 여행에서 돌아온 날, 내 방 한쪽에는 여행 가방이 열려 있었다.
빨랫감과 기념품이 뒤섞인 채,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 가방을 치우지 못한 건, 여행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낯선 공기, 사람들의 표정, 길가의 소리와 냄새가 아직 머릿속에서 생생했다.


이전의 나는 늘 ‘가봐야겠다’는 생각만 했지, 정말로 표를 끊어 떠나본 적은 없었다.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을까, 혼자 모든걸 감당해야 할까 봐 겁이 났다. 그런데 막상 부딪쳐 보니, 생각보다 세상은 친절했다.
길을 묻는 내 손짓에 웃으며 대답해 주는 사람, 메뉴를 고르지 못해 서성이는 나를 향해 추천을 해주는 가게 주인.


그 경험이 내 안의 무언가를 깨뜨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는 정해 두었던 경계선이 사라진 것이다.


그 후로, 나는 더 이상 ‘언젠가’라는 말을 쓰지 않게 됐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도시의 이름들을 하나씩 실제 계획표에 적었고, 주말이면 공항으로 향했다. 가끔은 미리 계획하지 않은 여행을 떠났고, 환승 시간이 길면 공항 밖으로 나가 짧은 산책을 했다.


여행을 늦게 시작했다는 건,
다른 누구보다 신선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거리의 색, 사람들의 말투, 카페 창가의 햇빛 한 조각까지도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세상을 발견하는 듯 새롭게 다가왔다.


물론 여전히 서툴렀다.
지하철을 잘못 타 반대 방향으로 가거나, 주문한 음식이 전혀 예상과 다르게 나오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든 실수가 여행의 일부가 되었다. 그날의 실수를 떠올리며 웃을 수 있다는 건, 이미 두려움을 넘어섰다는 증거였다.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모든 장면을 더 오래 붙잡고 싶었다.사진보다 마음속에 새기려 노력했고, 그 순간의 공기까지 기억하려 애썼다.
여행이 내 삶을 바꾼 건 화려한 장소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길 위에서 웃을 수 있다는 자신감, 예상치 못한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지금도 누군가 “나도 여행을 해볼까?” 하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늦어도 괜찮아요.
늦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선명하게 남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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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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