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일상

by 수박씨

간암 선고를 받고 4개월여, 끝내 아빠는 이 세상과 작별했다.

변변찮은 유서도, 유언도 없이.

마지막 예배를 마치고, 심장이 멈추었다.

마지막 순간을 함께 했다는 것에 감사했다.

아빠가 부를 때에 지체하지 않고 가봤던 것이, 위안이 되었다.

아빠의 굳은 몸을 안고 꺼이꺼이 울 때는 슬픔이었는데,

아빠를 태워 한 줌 흙으로 만들어 꽃으로 피우는 장지에 가서는 평안이 있었다.


그렇게 무심할 수 없던 큰일이 있었고, 한 달이 지났다. 인생의 가장 큰 일 중 하나일 텐데, 일상은 참 그대로, 바쁘게만 흘러갔다. 평소에도 아빠와 가깝게 지내진 않았던 터라, 살아계셨을 때의 일상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단지, 아들이 마포 할아버지를 찾을 때면,


할아버지는 이제 아프지 않아. 아프지 않은 천국에 계셔.


라고, 말해주는 것 말고는.


그러는 사이, 부서 이동도 했다.

더는 전화는 받지 않아도 됐다.

마음이 정돈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객들을 대하기가 힘에 부쳤는데 때마침 자리가 생겼다. 지원했던 부서는 아니지만, 전화는 안 받아도 되니 가겠다고 했다.


살아서는 아빠가 참 마음의 숙제 같은 존재였는데, 돌아가시니 다 아빠가 도운 것 같다. 살아계실 때보다, 더 곁에 함께하는 느낌이다. 가족들도 무슨 좋은 일이 생기면, 아빠다 도왔나 보다, 자연스레 말한다.


이제는 책하고는 관련이 없는 상품에 대한 안내였고, 쇼핑도 잘하지 않는 내가 상품 안내를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보름이 지나 보니, 옮기길 잘했다 싶다.


책을 읽고 쓰고 정보 입력만 줄곧 할 때는 누군가에게 소개를 하고 싶었고, 인바운드에서 하루 종일 전화만 받으며 고객 상대를 하자니, 심신이 피로했는데, 지금은 반반이 섞였다. 글로도 안내하고, 적당히 통화도 하는 이 일에 만족한다. 보통은 반품을 해달라는 고객과 반품을 해주더라도 고객부담의 배송료가 있다든지, 아예 반품이 불가하다든지 등의 업체 의견을 전달해야 하는 입장인데, 나름의 기준으로 조율을 해주는 일이 해결 불가한 일은 해낸 것처럼 뿌듯하다. 쌓여있는 문의글을 하나씩 없애 ‘0’을 만드는 기분도 게임처럼 재미있다. 예상치 못하게 욕받이가 되는 고객은 만나지 않아도 되었고, 요구사항에 대한 해결책만 제시하면 되었다.


6개월마다 로테이션하는 업무인지라 다음부터가 걱정이긴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점심 한 시간


회사 뒷담화 전문 앱 '블라인드'에 "단체로 밥을 같이 먹어야 하나, 맨날 같은 얘기 해서 할 말도 없는데 혼자 먹고 싶다"라는 글이 인기였다. 너나 할 것 없이 혼자 먹으세요, 다른 부서와 약속을 잡으세요, 다이어트한다고 하세요 등의 댓글이 달렸다.


밥친구가 없어 회사생활이 외로운 터였는데, 밥을 맨날 같이 먹어도 고민이구나 싶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친한 친구들에게 나눠보았다. 아무래도 회사 ‘은따’인 거 같다고.


7번째 이직하여 공무원으로 정착 중인 한 친구는, 이직자는 기존 멤버에 끼기 힘드니 그냥 '존버'하라는 가장 와닿는 조언을 해줬다. 더 이상 관계를 생성하는 것도 귀찮은 나이라는 것. 친구는 점심시간에 김밥 주는 영어학원에도 다녀봤다 하고, 그녀의 지인은 요가학원을 다니며 운동을 했단다.


또 다른 공무원 친구는 이랬다. 그녀도 육아휴직 후 복직한 상황이고 밥 먹을 동료가 없었단다. 그렇게 지내다 세명이 함께하는 무리에 밥을 같이 먹자고 껴달라고 해서 같이 먹고 있단다. 이후에 새로운 육아휴직 복귀자가 들어왔고, 친구 하고만 친분이 있었단다. 그녀가 싫은 건 아니나 절친도 아니었고, 상급자였으므로 같이 밥 먹자고 할 경우, 다른 동료들과 친해지도록 중간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런 신경을 쓰고 싶지 않기도 했고, 코로나로 4인 이상 식사를 못하기에 그녀가 끼면 인원이 애매해진다는 거였다. 친구는 마음은 쓰였으나 같이 먹자고는 할 수 없었고, 새로운 복귀자는 혼자 도시락을 싸와 먹었단다. 러니까 너는 은따가 아니라 그저 다섯 번째 사람이라는 것. 그 말이 그 말 같 위로가 썩 된 것은 아니었으나, 상황적인 이해는 됐다.


반강제적으로 혼자만의 점심 한 시간이 주어졌다. 나의 점심 한 시간은 어떻게 보내야 할까. 처음 며칠은 페디큐어도 하고, 못 갔던 병원도 예약하고, 속눈썹 펌도 하는 등 소비 위주로 지냈다. 그러다 마침 같은 건물에서 할인 중인 필라테스 운동권을 끊었다. 점심 먹을 시간은 없어 일하는 짬짬이 달걀, 빵 등 간단한 식사로 대체했다. 밥을 먹고 싶을 땐 맘에 드는 동료를 불러내어 가끔 외식도 했다. 이도 저도 싫을 때는 근처 서점도 다녀오고, 글도 썼다. 개인생활로 점심을 채우니 시끄러웠던 마음이 진정되었다. 참, 회사생활은 버티기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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