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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박씨 Oct 04. 2023

연휴일정

이렇게 긴 연휴에 일정이 하나도 없었다. 원래는 시댁 식구들과 리조트를 몇 달 전에 예약해 두었는데, 엄마의 급작스런 항암으로 취소되었다. 사실 취소하지 않고 남편이 아이들만 데리고 가서 명절을 즐거이 보내길 바랐는데, 정의로운 남편은 소식을 듣자마자 여행부터 취소해 버렸다. 좀 물어나 보지.. 병원은 어차피 1인만 출입만 가능해 남은 사람은 일상을 살면 되는 거였는데 굳이.... 좀 물어나 보지!


그리하여 장장 6일간의 연휴를 우리 가족끼리만 보내면 되었다. 뭘 하며 보내면 좋을까. 이제와 우리 가족끼리 여행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엄마 모셔야 할 채비를 해야 하니 정리 좀 해놔야겠다 싶어, 도서관에서 청소에 관한 책들과 아이들 읽어줄 책을 한 아름 빌려가지고 왔다.


연휴 첫날, 첫날이니 그냥 쉬었다.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을 시작하며. 엄마 병원과 시댁에 가져갈 갈비찜도 좀 했다. 처음 해보는 음식이라 블로그를 열어 놓고, 레시피 대로 해.... 야 하는데, 내가 하고픈 방식이랑 섞이는 바람에 간에 실패했나 불안하다가... 그럭저럭 먹을만한 음식으로 마무리했다.


둘째 날, 드디어 아이들 옷정리를 시작했다. 여름옷은 싹 꺼내어 거의 다 버리고.. 가을 옷을 들였다. 아~~ 하나 끝났다. 옷 방이 깨끗해졌다. 개운~~ 하다. 저녁엔 엄마를 보러 병원에 갔다. 병실에는 갈 수 없어 로비에서 만났다. 그래도 온 가족이 모일 수 있어 반갑고 좋았다. 비록 병원이지만 웃고 떠들 수 있어 감사했다.


셋째 날, 시댁을 방문했다. 음~~ 역시 어머님이 해주시는 음식이 최고다. 가자마자 아이들과 신랑 모두 잡채 흡입.. 저녁까지 얻어먹고 마무리.


넷째 날은 교회다. 연휴 때 시작한 드라마가 절정이라 새벽까지 질주하다 늦게 일어나 교회도 늦고, 다녀와서도 드라마 폐인모드로 보내다, 남편 귀가 후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신나게 한 시간 놀고 돌아와 저녁 먹고 씻으니 하루가 다 갔다.


그러고 보니 보름달도 못 봤네.


다섯째 날이다. 오늘은 아이들을 위해 평소 가고 싶었던 [옥토끼 우주센터]를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아빠의 컨디션을 살피느냐 확정하진 못하다가, 천천히 일어나 준비하니 11시. 내비를 켜보니 1시간 반이나 걸린다. 옥토끼 홈페이지를 아이들에게 보여줬는데 대단히 반기는 기색 아니다. 갈까 가지 말까.. 하다가 강화도 근처 캠핑 카페를 발견하고, 가보자 했는데.. 가도 가도 한 시간의 시간이 줄지 않고, 남편은 연신 한숨이다. 옆에서 첫째가 그런 아빠에게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자!"라며 아빠를 다독인다. 여덟 살 난 아들이 듬직하고 기특하다. 그래도 도착해서는 조개찜과 라면으로 기분 좋게 배를 채우고, 갯벌로 향했다.


그런데 망할 갯벌은 너무 더웠고, 진흙이 너무 깊어 아이들은  옴짝달싹 못하고, 화장실도 가기 버거워 바지에 싸버리고, 잡을 수 있는 생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 셋이 수로를 만든다며 신나게 뛰어다니며 잘 놀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을왕리 가도 되었지. 거긴 물이라도 있어 시원할 텐데.. 노는 게 다가 아니다. 이제 씻기고 진흙을 정리하고 집에 가는 것이 일이었다. 남편의 심기를 건들지 않기 위해 미리 물건들을 씻어놓고 딸내미들 씻겨놓고 차에 짐을 가지러 왔다 갔다 하며 이 한 몸 불살랐다. 슬러시를 먹이고 차에 무사히 돌아가는 길에야 비로소 안도했다.


다시 돌아가는 데 두 시간. 남편의 한숨이 다시 시작됐다. 운전을 돌아가면서 하든가.. 왜 운전대는 혼자 잡고서 한숨 퍼레이든지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었다. 남들 다 쉬는 휴일밖에 못 쉬는 처지인데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닌가? 혼자만 시간 아깝고 힘드나? 아이들이 다 잠들고 터졌다. 도대체 왜 사람 눈치 보게 만드느냐고 한바탕 해댔다. 여행 후에 나오는 항상 같은 레퍼토리. 지긋지긋하다. 남편 빼고 여행 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아직은 아이들 케어에 혼자는 무리이기에. 오가는 긴 여행길도 기꺼이 조력할 동반자를 꿈꾸며. 세 놈 중 한 놈은 있겠지..


대망의 마지막 날이다. 오늘은 장난감 정리를 하기로 아이들과 약속했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을 먹고 아이들은 티브이를 보고, 나는 빌려온 책을 '이제야' 집어 들었다. 연휴 마지막 날에. 하하하. 집은 내 마음의 상태고, 깨끗이 할수록 삶이 바뀐다는데.. 치약 튄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화장실 거울이 아닌지 돌아보라던 [청소력] 책을 읽고 뜨끔. 거울 클리너를 주문해야 하나..


졸다가 읽다가 하다, 아이들이 하루종일 티브이만 보고 있고, 냉장고를 연신 열었다 닫았다 한다. 냉장고 좀 열지 말라고!! 한바탕 꽥하고 보니 핫도그 하나 주고 점심이 다 되었다. 책을 덮고 부랴부랴 된장국에 밥을 말아 먹이고 장난감을 거실 한가득 꺼냈다. 레고만 네 박스.. 꺼내온 장난감에 아이들은 정리는커녕 새로운 놀이로 빠져든다. 그러다 막내는 화장실도 못 가 오줌을 두 번이나 싸고, 내 정신은 미치광이가 되었다.


이럴 때는 나의 남편 해결사가 와야지!!!! 아무거나 대충 버리도 정리해 줘도 남편의 빠릿빠릿한 행동이 내 정신을 가다듬어 준다. Sos를 치고 10여분 만에 도착한 덕에 후다닥 장난감 정리가 마무리되었다. 나는 차마 못 버리겠는 걸 척척 버려줘서.. 고맙다 남편. 어제는 버리고 싶었건만 오늘은 쓸만하다! 부부의 세계란..


보고 있던 드라마에서 주인공 덕임이 정조의 승은을 입으며 부부가 되었는데, 정사로 바쁜 남편을 기다리던 덕임의 독백이 생각났다.


"오늘은 행복하다 어떤 날은 슬퍼지고 결국 살아간다는 건 그런게 아닐까. 마냥 기쁠 수도 마냥 슬플 수도 없는 것."


어제는 나쁘다가 오늘은 살만하고 내일은 행복한, 이런 하루하루의 연속이 삶인 거겠지.


연휴의 마지막은, 딸들과 목욕탕을 다녀오며 개운하게 마쳤다. 이게 바로 연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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