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네의 일기』에서 행복을 찾다.
미국의 어느 고등학교에 젊고 예쁜 국어 선생님이 발령받았다. 운 나쁘게도 ‘문제아’가 모인 반으로 말이다. 아이들은 냉담했고, 툭하면 싸웠다. 이유도 모른 채 그들은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멀리하며 원수처럼 여겼다. 나치가 단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인 것처럼, 아이들의 싸움은 어른들에서부터 내려오는 뿌리 깊은 악습이었다. 선생님은 문학이 그런 악습을 끊게 해줄 것이라 믿었다. 『안네의 일기』를 통해 선생님은 학생들을 처음부터 다시 가르쳤다. 안네가 자신의 비극을 하나하나 적어 세상에 알렸던 것처럼, 학교에서조차 버려진 아이들도 ‘자신들의 비극’을 적어 내려감으로써 원인모를 아픔을 ‘성장통’으로 바꾸어 내리라는 믿음으로 말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졸업할 가망이 없었던 아이들이 ‘전원 졸업’이라는 기적을 만들어낸다. 위의 이야기는 실화로, 이들의 젊은 선생님이 제자들의 일기를 묶어 『프리덤 라이터스 다이어리』는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내 이십 대 시절은 방황의 시간이었다. 강압적인 아버지, 강압적인 아버지를 벗어나 더 억압적인 남편을 만난 언니가 내 삶의 어두움이었다. 경제적으로도 힘들었다. 강압적인 데다가 돈도 못 벌어오는 아빠를 볼 때면 억장이 무너졌고, 시집 간 언니가 어려울 때마다 손을 벌릴 때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처럼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어느샌가 나는 스스로를 피해자로 내몰았다. 그들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구겨져 버렸다고. 술을 먹고 친구들과 신세한탄을 하다 보면 불행이 조금 위로가 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삶이 제자리를 찾은 때는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부터였다.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를 적어내려 가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았는데, 우연하게 자리 잡은 직장은 글쓰기를 삶으로 만들어줬다. 글쓰기는 처음에는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쏟아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지만, 점점 타인을 바라보고, 숨겨진 일상의 비밀을 찾게 해주는 친구가 되었다. 글을 쓰면서 생각이 구조화됐고, 나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면서, 가족과 나를 분리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안네의 일기』에는 일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모든 치유의 힘이 들어있다.
“나는 지금까지 일기를 써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도대체 열세 살 먹은 소녀의 고백에 흥미를 가질 사람이 누가 있겠어? 하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야. 나는 쓰고 싶고, 가슴속에 숨어 있는 것을 모조리 털어놓고 싶어”
“나에게 가장 괴로운 것은 누구보다 더 자기 자신을 비판하고 꾸짖는 일이야. 이런 때 엄마가 쓸데없이 참견하시면 참을 수 없이 절망한 나머지 화를 버럭 내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말아. 그리고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해요’라는 안네의 특허 문장이 튀어나오지.”
“키티! 페터는 나를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사랑해. 그 애정은 나날이 깊어가지. (중략) 한 이틀쯤 페터에게 가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리워지니까.”
1942년 6월 14일, 안네는 생일에 일기장 하나는 선물로 받는다. 그리고 일기장을 자신의 유일한 친구 ‘키티’라 부르며 모든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렇게 적어 내려간 2년간의 일기 속에는 사춘기 소녀가 겪을 만한 모든 일들, 부모와의 갈등, 이성과의 관계, 자의식의 발달 등이 압축적으로 담겨져 있다. 생각하는 것들을 글로 적어내면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에, 회오리치는 사춘기의 내적 갈등들을 안네는 좀 더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 아침 판 단 아주머니는 몹시 울적한 표정으로 불평만 늘어놓고 있어. 첫째, 아주머니는 감기가 들었는데 약을 쓰지 못해. 콧물이 나는 것을 견딜 수 없는 모양이야. 둘째, 날이 흐리다든가 상륙 작전이 시작되지 않았다든가, 창 밖을 내다볼 수 없다든가, 이런 것들이야.
“뒤셀 씨는 아이들을 퍽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의 재미있는 말 상대가 되어줘. 그런데 요새는 차차 그 본성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있어. 그는 예의범절에 대해서 지루하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구식 훈련주의자야. 나는 행복하게도 치과 의사 선생님과 침실을 같이 쓰게 되었고-아, 좁은 침실인데-게다가 나는 유난한 말괄량이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똑같은 잔소리를 몇 번이고 듣지 않을 수가 없어.”
두 번째 힘은 매일의 인상 깊었던 일을 기록으로 남기기에, 자신과 관련된 모든 이들의 역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안네는 일기를 통해 네덜란드가 독일에 점령당해 있던 2년 동안, 여덟 가족이 은신처에 모여 지냈던 갖가지 에피소드를 사춘기 소녀만의 섬세한 시각으로 그려냈다. 아버지 오토 프랑크, 어머니 애디스, 언니 마르코드, 함께 살았던 판 단 부부와, 치과의사 뒤셀 씨 등 함께했던 모든 이들의 성격과 전쟁 당시의 불안한 마음들까지 생생하게 그려진다.
우울한 소식은 이것뿐이 아니야. 너도 인질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겠지. 이것은 파괴 행위에 대한 새로운 처벌 방법이란다. 세상에 이렇게 무서운 가혹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저명한 인사들-물론 무고한 시민들이지만-이 대신 감옥에 끌려가고 있단다. 만일 범인이 체포되지 않으면 게슈타포는 대여섯 명의 인질을 한꺼번에 총살해버린다는 거야. 이런 사람들의 사망 기사가 사고사라고 날마다 위장되어 날마다 신문에 보고되고 있어. 독일 사람들이란 참 영리한 민족이야! 과거에는 나도 독일 국민의 한 사람이었는데……. 히틀러가 나타나서 우리의 국적을 박탈해버렸지. 독일인과 유대인은 숙명적으로 원수인 모양이야.
마지막으로, ‘사회적 역사’까지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일은 그저 ‘나 혼자만의 일’일 뿐일까? 우리가 하는 모든 고민들은 결국 사회의 정책과 문화, 세계의 경제 등에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전쟁으로 인한 끔찍한 일들은 소녀의 일상에서, 거리의 풍경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안네는 아이답지 않은 성숙한 필치로 어른들이 자아낸 전쟁의 참혹함과 부조리함 등을 고발하며, 지금까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으며 세계의 평화를 만들어내는 일에 일조하고 있다. [안네의 일기]가 전쟁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네가 전쟁의 참혹함에도 꿋꿋하게 사춘기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가장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일기장 덕분이었을 것이다. 예민한 사춘기의 시기에 누구에게도 터놓을 수 없는 이야기를 터놓기도 하고, 가족을 포함한 함께 사는 이들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기도 하며, 사회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이슈들에 대해 예민한 시각으로 자신만의 생각을 키워나갔다. 열세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를 담은 2년간의 일기에는 안네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얼마나 성숙했는지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한 해가 마무리될 때마다 하는 일 중 하나는, 일기장을 꺼내보는 것이다. 한 해 동안 무슨 일 있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누구를 만났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한 해를 정리해볼 수 있다. 일기는 늘 갖고 다니는 노트에도 있고, 블로그에도 있고, 여저저기 끄적거리던 글들에도 있다. 어디에 쓰든 중요하지 않다. 나를 주인공으로 기록을 남겨보라. 분명히 그 누구보다 좋은 친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행복과 아주 먼 삶을 살고 있다면,
감히, 일기를 써보라고 권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