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님 전화였나요?

by 수박씨

9:00~18:00시 정확하게 시작되고 끝나는 직업인지라, 점심시간도 정확하게 맞추어야 한다. 12:00 타임과 1:00시 타임 두 개 조로 나누어 식사를 하게 되고, 외부에서 먹으면 시간이 부족하여 센터 휴게실이나 자리에서 간단히 먹는 경우도 많다. 그런 애로사항에 대한 배려로 회사에서는 런런 제도가 있다. 점심시간을 30분 늘려주는 것인데, 성수기에는 불가하고 콜 인입이 적은 때에 매니저 및 관리자들의 협의 하에 비정기적으로 진행된다. 30분 연장의 점심시간은 그래서 아주 귀한 시간인데, 이 런런 때에 때마침 버라이어티 한 고객들이 몰려와 확인-안내를 반복하다가 30분을 날려버렸다.


나는 아쉬워하며 한 동료에게 말했다.


나) 런런 30분을 날려버렸지 뭡니까...

동료) 왜요? 할아버님 전화였나요?


나는 빵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당연한 듯 예상하는 답변에 백번 공감했기 때문이다. 할아버님 전화는 기본적인 통화 시간이 길기 때문에, 퇴근시간 무렵이나 점심시간 무렵의 어르신 전화는 기피대상 1호다. 통화 시간이 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단 상담원의 설명을 이해조차 못하시는 경우도 많고, 혼자 해보시려는 의지는 강하나 잘 찾지 못하며, 안 되는 부분도 계속해서 물어보시곤 하다 보니, 상담 시간 10분 넘기는 건 예사다. 보통 짧은 콜은 1~2분 내에 끝나기 때문에 최소 5 콜은 못 받을 뿐 아니라, 짧은 점심시간에 10분 이상의 전화가 마지막에 걸리면 난감하기 짝이 없다. 거기에 왜 이렇게 어렵게 해 놓았냐, 물어보는 게 왜 이리 많냐, 계좌번호가 왜 필요하냐 너네 계좌만 줘라, 등 안내에 수긍조차 하지 않는 경우엔 한 숨 고르고 가야 할 정도로 피로가 쌓인다.


어제 어르신은 실명인증이 안되어 4~5번 전화를 주시어 여러 상담원의 설명을 거쳤고, 나는 그중 두 번이나 그분을 마주해야 했다. 실명인증이 도저히 안 되는 상황이고 도와드릴 방법이 없어 전화로 대신 주문해드리겠다고 했다. 도서명 말씀해 달라고 하자, 못 알아듣는 말로 중얼중얼 대셨다. 재차 반복하여 도서명을 물으니, 아내의 맛, 섹스의 기술 등 실명인증이 필요한 도서들이었다. 차마 말씀을 다 못하시고 다시 시도하겠다며 황급히 끊으셨다.


오늘은 또 전화주문은 할인가 적용이 안되니 직접 인터넷 주문을 하겠다고 도움을 요청하신 할아버님이 등장했다.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넣는 것부터 도서를 선택해서 결제하기까지, 기다라고 또 기다렸다. 주문된 것을 다 확인하고 나서야 통화를 종료할 수 있었는데, 그래도 해낸 것에 뿌듯함을 느끼며 끊으시는 고객을 보니 나도 덩달아 만족스러웠다.


어쨌든 어르신께는 죄송하지만, 언젠가 나도 (어쩌면 이미)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될 테지만, 어르신의 전화가 많은 날은, 그 날의 콜 수는 포기해야 하는 날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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