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문구

만년필과의 인연

by 세삼



아무튼, 문구(2019)

지금까지 읽은 아무튼 시리즈 중에, 가장 프로페셔널하고 존경스러운 책이었다.

* 펜텔 트라디오, 에너겔, 마하펜, 팔로미노 연필, 빅 4색 볼펜, 샤피 네임펜 등을 좋아해 여러 자루 사두었다. 펜이 아닌 것으로는 비망노트, 무인양품 문고본 노트, 컴포지션 노트 등을 쟁여두었다.

문구류를 좋아하고 자주 구경도 다녔던지라, 공감하며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레벨이 달랐다. 괜히 '문구'를 전면에 다룬 게 아니었다. 그러면서, 나는 어떤 것에 이만큼 빠졌던 적이 있었나 생각해본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에 진학하던 날, 만년필을 선물해 주었다. 이제 다 큰 거나 다름없으니, 연필, 볼펜이 아닌 만년필을 써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주변에 만년필을 쓰는 친구는 없었고, 나는 서랍 속에 만년필을 고이 보관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던 날, 아버지는 내게 만년필을 선물해 주었다. 나는 요즘에 이런 걸로 누가 필기하냐며 필요 없다 했지만, 아버지는 받아두라며 내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 나는 서랍을 열어, 예전에 받은 만년필 옆에 놓아두었다.

대학을 진학하자, 이번엔 어머니가 만년필을 선물해 주었다. 여자란 이유 하나만으로 제대로 교육 한 번 받지 못한 어머니가, 아들의 대학 진학을 축하하고자 문구점에 가서 직접 사온 것이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알기에, 나는 군소리 없이 받아들고 학교가 있는 도시로 상경했다.

시간이 흘러, 타지에서 하는 5번째 이삿날.

짐 정리를 하다, 어머니가 준 만년필이 나왔다. 익숙하지 않은 타지 생활에 적응하느라 까마득히 잊은 만년필은, 잡다한 물건을 넣어두던 박스 안에 있었다. 혹시 하고 뚜껑을 열어 종이에 써봤지만, 잉크가 말라버린 만년필은 더 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없었다. 죄책감이 들어 문방구에서 잉크를 사 넣어봤지만 소용없었다. 갑자기 온 마음이 슬퍼졌다. 아들의 대학 진학에 기뻐하며 골랐을 어머니의 얼굴이, 그걸 흐뭇하게 보던 아버지의 표정이 생각나서 말이다.

더 시간이 흘러, 나는 어머니에게 만년필을 선물했다.
늦은 나이에도 글 공부를 하겠다며 하나 둘 적어가는 모습에 기뻐서 였을까, 고르고 골라 만년필을 선물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만년필을 서랍에 보관하고,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너무나 아까워서, 그냥 쓰기엔 아깝다며, 오늘도 모나미 볼펜으로 공부를 한다.

keyword